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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각 시대 및 6書 분류에 의한 대표적 서예가들을 중심으로-

    李 正 美 (江原大)

    Ⅰ. 머리말

    Ⅱ. 각 시대 및 6書에 의한 인물

    유형 분류

    Ⅲ. 심미창조 주체로서의 예술가

    Ⅳ. 宣和書譜의 人才像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북송시대는 유․불․도 삼교융합의 이념이 지배했던 시대이다. 따라

    서 예술 분야 역시 삼교의 문화적 가치관과 그 파급적 효과에 의한 다

    양한 심미관 및 철학정신이 대대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

    은 당시 사회문화의 전반적인 구조체재 및 예술사상에서는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정신이라는 근대적 사고의 기틀을 엿볼 수 있었다.1) 이 때

    문화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이론 및 지식이 축적되어 체계화 되었는데,

    당시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주체인 사대부의 사상 및 이론적 가치를 함

    께 연계하여 탐색할 수 있는 서론서의 집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예컨대 歐陽脩(1007-1072)의 六一論書․集古錄, 蘇軾(1037-1101)의東坡論書, 朱長文(1039-1098)의 續書斷, 黃庭堅(1045-1105)의 山谷論書, 米芾(1051-1107)의 海岳名言, 徽宗 宣和年間(1119-1121)에

    1) 이에 대해서는 이정미, 宣和畵譜의 예술사상 ((주)한국학술정보, 2012)을참고.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38저술된 宣和書譜, 董逌의 廣川書跋 등이다. 이 가운데에 선화서보는 동시대에 저술된 다른 사료와는 다르게 관방의 선도 아래 집필된문헌이다. 이 사료에서는 예술가 198인2)에 대한 인물평, 작품평 및 예

    술사적 가치와 관련한 이론적 배경을 시대 순으로 기록하였고, 6書3)의

    분류 체재로 구성하여 각종 서체의 원류와 변혁에 대해 설명하고 있

    다. 이 같은 선화서보는 서예예술과 관련한 지식 및 이론적 가치를정립하고 체계화 시키는 데에 공헌하였다.

    최근의 선화서보에 관한 연구 경향은 서론과 관련한 역사적 이론및 사유의 지식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선화서보의 시대적 배경을 다룬 역사적 가치, 선화서보의 일부 작품론에 국한하여 평가한 예술론,선화서보의 미술사적 의의 및 특징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4) 그러나어느 시대의 어떠한 작품을 논하기에 앞서 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점은 바로 작품을 창작한 주체이다. 다시 말해 창작자인 예술가에 대

    한 탐구가 선행되어야지 올바른 작품 평과 예술사적 가치를 점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물 탐구는 바로 그들의 사회적 위치 및 예술사적 업

    적이 어떠했으며, 그들과 관련한 문화예술사상과의 교류 관계 및 심미

    의식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대상을 인식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에 대한 물음은 곧 예술가의 자질, 창조력과 직결되

    2)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2 2次 印刷), p.1에서는 서예가 197인, 작품 1,240여첩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문헌 고증 결

    과, 서예가 198인, 작품 1,228첩으로 수정해야 함을 밝힌다.

    3) 이에 대해서는 李正美, 宣和書譜의 書藝分類史觀 , (中國史硏究 77, 中國史學會, 2012), p.3 참조.

    4) 宣和書譜에 대한 선행 연구는 찾아 볼 수 있으나, 이 사료에 담긴 인물론에대해 종합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한 글은 적다. 그 예로 다음의 자료를 살

    펴 볼 수 있다. 秦琴, 李煜書學思想硏究 (美育, 科敎文化, 2010); 候姸姸,南唐後主李煜的書法成就述考 (蘭臺世界, 歷史硏究, 2012); 李尚軍, 不輸文采獨領風騷 -唐太宗的書藝․書論及其書史貢獻 (書法藝術 2, 1996) 秦琴과候姸姸은 선화서보에 담긴 李煜의 서예론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熊飛ㆍ佘斯勇ㆍ陶炎武은 선화서보에 기록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懷素의 법첩 목록에 대해 소개한 정도이다. 그리고 李尚軍은 唐 太宗의 서예론 및 그가 성취한 예술

    사적 업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39는 인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선화서보에담긴 인물론을 종합적으로 탐구하여 당시 미술문화를 선도한 그들의

    예술사적 위치 및 구체적인 업적을 살피고, 거기에 내재된 이들의 인

    재상을 살피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문화예술과 관련한 지식인, 다시 말해 예술가의 지성사적 가치관에 대

    해 보다 엄밀하고 다양하게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일찍이 春秋戰國시대(서기770-221)부터 저술되기 시작한 인물론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 생동감 있는 문장을 담은 글로써, 인물의 일

    생․생활환경․철학정신 등을 체계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성․문학성․역사성 그리고 사상성을 함께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는 前漢(서기202-9) 末 사마천의 史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구체적인 인물 묘사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기술하고 있는 紀傳體의 양식으로 발전한다. 東漢시대에 이르면 班固

    (32-92)의 漢書 古今人表 에서의 인물표 기준을 통해 상고시대의사회상황을 추론하는 인물론이 나타났으며, 後漢(25-220) 末 劉劭의 人物志에서는 인물을 변별하여 분석하는 형식의 인물론이 출현하였다. 더 나아가 魏晉南北朝시대(220-581)에 이르면 문학과 사학이 뚜렷

    이 분리된 양식의 인물론이 흥기하면서, 당대 이후로는 복잡하고 다양

    한 양식으로 유행하다가, 송대에 이르러서야 더욱 체계적이고 구체적

    인 형식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계통성 있는 서예가들의 인물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으며, 6서로 분류하여 체계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구

    비한 그들의 작품평과 심미관을 탐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필

    자는 선화서보 제 1권에서 제 20권까지의 서예가 198인의 사회적 위치 및 신분이 다양한 계층과 영역에서 활동했던 점을 눈여겨보았다.

    이는 곧 인물의 성격, 성향, 관계적 특성, 사상적 경향, 종교적 특징 등

    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문헌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가 있다. 예

    컨대 선화서보에서는 황제․여제․왕족․駙馬都尉․시인 및 문학가․문신 및 사대부․무신 및 장군․전문서예가․승려․도사는 물론이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0거니와 기생․女仙 등이 남녀노소, 신분고하의 제재 없이 각 시대와 6

    서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이는 사료에 내재한 인물들의 특징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추론하고, 또 이들의 일상생활 및 심미철

    학을 탐구할 수 있는 장점 및 의의가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선화서보에 담긴 인물론을 탐구하기 위해 다음의방법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서예가 198인을 시대 순, 6서의 분류에 따라 황제․여제․왕

    족․부마도위․시인 및 문학가․문신 및 사대부․무신 및 장군․전문

    서예가․승려․도사․기생․여선 등의 사회적 위치 및 신분 유형으로

    나누어서 그들의 사회적 특성과 심미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때

    각 시대 및 6서 분류에 의한 대표적인 서예가들의 평론을 발췌하여서

    폭넓게 검토하고, 여기에 담긴 그들의 심미관 및 사회문화와의 관계적

    특성을 파악할 것이다.

    다음으로 앞서 탐구한 인물 분류 및 특징적 내용을 토대로 선화서보에 담긴 인물론의 의미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북송시대문화예술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황실과 문인사대부의 심미관을 바탕으

    로, 옛 선현들이 논한 ‘用人’과 ‘知人’의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

    찰하고, 이를 빌려 선화서보의 대표적인 서예가들의 인물 품평에 대입하여 그 의미를 논해 볼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이 오늘날의 사

    회현상과 인맥의 구조체계에서 어떤 시사점을 제시하는지도 함께 살펴

    보고자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옛 선현들의 인물관을 빌려 오늘날

    국가사회의 인재 양성, 문화예술의 번영에 대하여 조망해 보고, 그것의

    발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소박하게 논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각 시대 및 6書에 의한 인물 유형 분류

    다음의 에서 알 수 있듯, 198인 가운데에서 서예가가 가장 많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41

    篆書 隸書 楷書 行書 草書 八分

    秦․漢(2) 鍾繇 張芝

    魏晉南北朝

    (58)蕭思話 외

    1인王衍외14인

    曹植 외40인

    隋(2) 薛道衡 釋智永

    唐(96)李陽冰 외

    3인韓擇木

    楮遂良 외26인

    太宗 외38인

    裵行儉 외20인

    于僧翰 외3인

    五代(16)錢鏐 외

    6인羅隱 외

    5인杜荀鶴 외

    2인

    宋(24)益端獻王외 2인

    宋綬 외7인

    李煜 외8인

    種離權 외3인

    합계 (7) (1) (46) (69) (70) (4)

    이 집약된 시기는 唐대이며, 6서 중에서는 草書 70인, 行書 69인, 楷書

    46인 순으로 서예가들이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화서보에서는전체 198인의 서예가들 가운데 거의 반에 가까운 96인이 당대에 집중

    되어 있으며, 초서와 행서에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다.

    각 시대 및 6書 분류에 의한 서예가 분포

    참고) 괄호 안의 숫자는 각 시대, 각 서체에 해당하는 서예가들의 합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선화서보에서 가장 많은 법첩을 기록하고 있는 王羲之(303-361)는 魏晉南北朝시대 東晉(316-420)의 서예가로 모두 243첩의

    작품 중 194첩이 초서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법첩 수를 기록하고 있

    는 서예가로는 懷素(725-785) 101첩, 王獻之(344-386) 89첩, 蔡京(1047-

    1126) 77첩, 歐陽詢(557-641) 40첩, 顔眞卿(709-784) 28첩, 智永 26첩5),

    玄宗(685-762) 李隆基 25첩, 張旭(675-750)과 李煜(937-978)이 각각 24

    첩, 亞栖 15첩, 虞世南(558-638)과 吳彩鸞이 각각 13첩, 賀知章

    (659-744) 12첩 등의 순이다. 여기서 왕헌지, 채경, 이욱을 제외한 나머

    지 인물들은 모두 당대 사람이며, 선화서보에 기록된 법첩 수가 10첩이 넘는 서예가들도 당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p.320에서는 智永의 법첩 수를 23첩이라고 기록하고있지만, 실제로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법첩 수는 26첩이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2

    秦․漢 魏晉南北朝 隋 唐 五代 宋 합계

    황제 晉武帝(2)

    太宗(14) 玄宗(25)

    肅宗(7) 代宗(7)德宗(1) 宣宗(3)昭宗(1)

    太祖(1)末帝(1)世宗(1)

    11*

    여제 則天(1) 1*

    왕족 陳伯智(1)益端獻王(1)

    錢俶(2)3*

    부마도위

    蔡凝(1) 杜預(1)王敦(1)

    3*

    문신․사대부

    鍾繇(1)

    蕭思話(1)王僧虔(2)

    王衍(1) 桓溫(1)謝萬(3)孔琳之(1)皇象(1) 張華(2)衛恒(1) 王渾(1)王戎(1) 王濛(1)陸機(2) 郗鑒(1)王導(2) 王洽(4)王珣(2) 王瑉(2)謝尙(1)王獻之(89)王曇首(1)羊欣(1)薄紹之(2)沈約(1)蕭子雲(3)阮研(3)蔡景曆(1)蔡證(1) 陸繕(1)毛喜(1) 江總(1)

    薛道衡(1)

    李陽冰(3) 衛包(1)元度6)(4) 韓擇木(4)褚遂良(10)顔眞卿(28) 徐浩(3)元稹(1) 李商隱(2)柳公權(11) 蕭遘(2)陸扆(1) 李磎(1)陸希聲(1) 楊钜(1)崔遠(1) 張顫(1)郑裔(1) 戎昱(1)趙模(1) 許渾(2)張欽元(2) 薛貽矩(1)虞世南(13)歐陽詢(40) 歐陽通(2)陳柬之(6) 李邕(10)吳通玄(3) 張籍(1)杜牧(1) 李景讓(1)裴休(1) 盧知猷(1)吳融(5) 韓偓(2)任疇(1) 林藻(1)徐凝(2) 韋莊(3)裴行儉(1) 賀知章(12)徐嶠之(1) 裴素(1)

    楊凝式(3)

    徐鉉(7)盧汝弼

    (1)

    豆盧革

    (10)

    王仁裕

    (1)楊邠(1)潘佑(1)

    孫昭祚

    (5)

    杜荀鶴

    (1)

    宋綬(8)蔡襄(3)石延年(1)

    陸經(4)王子韶(1)

    李建中(4)

    蘇舜欽(5)

    王安石(1)

    蔡京(77)

    蔡卞(6)劉正夫(2)

    米蒂(2)岑宗旦(4)

    杜衍(1)周越(3)

    101*

    무신․장군

    謝奕(1) 謝安(3)陸玩(1)王徽之(4)王邃(1) 王筠(1)

    蘇靈芝(1) 張旭(24)孫過庭(3) 張庭範(8)裴潾(1)

    錢鏐(1) 20*

    그렇다면 선화서보에 담긴 198인의 사회적 특성, 심미적 특징 및인물 유형 등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회적 위치 및 신분에 주목하

    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를 살펴보도록 하자.

    宣和書譜 서예가들의 사회적 위치 및 신분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43

    崔龜從(1)

    曹植(1)諸葛亮(1)索靖(4) 郗愔(2)王廛(4) 王恬(1)庾翼(2)

    승려 智永(26)

    元雅(1) 曇林(1)

    懷仁(2) 行敦(1)齊己(9) 懷素(101)亞서(15) 高閑(3)警光(2) 景雲(1)貫休(8) 夢龜(10)文楚(1) 靈該(1)

    應之(2) 法暉(1) 17*

    도사․신선

    陶弘景(6)杜光庭(1) 梁元一(1)魚又玄(1)

    陳景元(8)

    蒲雲(2)鐘離權(1)

    7*

    화가․전문서예가7)

    張芝(2)王羲之(243)劉瑉(1)

    韋榮宗(6) 張彥遠(11)章友直

    (1)6*

    시인․문학가

    謝靈運(1)景審(1) 李白(5)白居易(5) 司空圖(2)

    羅隱(4) 6*

    기생․여성

    詹鸞(2) 薛濤(1) 2*

    女仙 吳彩鸞(13) 1*

    기타

    張翼(1)詹思遠(1)郑佃(1) 陳逵(2)陳叔懷(1)

    顧紹孫(1) 楊庭(1)鈕約(1) 李霄遠(2)張仲謀(1) 韋權(2)胡季良(10) 章季規(1)於僧翰(2) 貝冷該(1)周嶬(1)

    李景(1)

    李煜(24)

    薛存貴

    (5)張徐州

    (1)

    20*

    참고) 괄호 안의 숫자는 법첩 수를 나타낸다.

    *표식의 숫자는 서예가들의 합계를 나타낸다.

    6) 唐元度는 당대 사람이 아니다. 송대 朱長文의 續書斷 卷下, 陳思의 書小史에 의하면 唐玄度라고 칭해야 한다. 그러나 에서는 宣和書譜의 기록에따르기로 한다.

    7) 본고에서는 宣和書譜에 담긴 서예가로서의 자질 및 특출한 기록, 작품 수,후대 서예계에 끼친 영향력 및 파급력, 서풍의 확립, 서예 이론의 정립 등에

    의거하여, 당시로서는 전문서예가라는 명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물

    유형의 분류 기준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劉瑉, 韋榮宗 등은 사실상 서예가로

    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宣和書譜의 기록에 따른 점을 밝혀 둔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4과반수를 넘는 101인이 문신이자 사대부이다. 당대 45인, 위진남북조

    시대 31인, 북송시대 15인, 오대 8인, 진한시대와 수대에 각각 1인이

    있다. 여기서 절반 가까이 되는 인물들이 당대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무신 및 장군은 위진남북조시대 15인, 당대 5인, 오대 1인으로 위진

    남북조시대에 집약되어 있다. 승려는 당대에 14인으로 압도적이다. 도

    사는 당대 3인, 북송 2인, 위진남북조시대 1인이 있다. 화가 및 전문서

    예가는 당대 2인, 위진남북조시대 2인, 진한시대 그리고 북송시대에 각

    각 1인이 있다. 시인 및 문학가는 당대 4인, 위진남북조시대와 오대에

    각각 1인이 있다. 기생, 여성 및 여선은 모두 당대에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기타 19인 가운데에 李煜은 南唐의 군주이나, 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楊庭은 則天 시기에 책을 抄書하는 사람이었으며, 張徐州는 지

    방 관리 출신이지만 기타에 포함시켰다. 그 외의 서예가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거나, 사료 및 전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총 13개의 사회적 위치 및 지위로 활동했던 198인의 서예가들 중 시

    대적 특성 및 중요도, 법첩 수, 6서, 평론의 내용적 특징 등을 고려한

    다면 다음의 인물들을 주목해야 한다.

    황족 및 부마도위 유형에서는 당 太宗(626-649) 李世民(599-649), 玄

    宗(712-756) 李隆基(685-762), 북송 英宗(1032-1067)의 네 번째 아들이

    자 徽宗의 숙부였던 益端獻王 赵颢, 司马昭(211-265)의 여동생 高陆公

    主와 결혼한 부마도위 杜預(222-285) 등을 탐구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서예가가 집약되어 있는 문신 및 사대부 유형에서는 潁

    川 長社(오늘날의 하남 許昌縣 자치구) 사람이며 太傅을 지낸 鍾繇

    (151-230), 將作少監을 지낸 李陽冰, 中書令을 지낸 王獻之(344-386),

    瑯玡 臨沂 사람이며 侍中을 지낸 王僧虔(426-485), 太尉를 지낸 王衍

    (256-311), 祠部尙書을 지낸 孔琳之(369-423), 吴郡吴县(오늘날의 江苏

    苏州)사람인 陸機(261-303), 太保 司徒를 지낸 王導(276-339), 中書令

    을 지낸 王洽(323-358), 尚書令을 지낸 王珣(349-400), 侍中을 지낸 蕭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45子雲(487-549), 太子率更令을 지낸 歐陽詢(557-641), 尙書右僕射, 河南

    公을 지낸 褚遂良(596-658), 太子太師를 지냈으며 魯郡公에 봉해진 顔

    眞卿(709-784), 越州(오늘날의 绍兴) 永兴(오늘날의 浙江萧山) 사람이

    었던 賀知章(659-744), 太子少師를 지낸 徐浩(703-782), 경술에 박학했

    으며, 문자 성운의 규칙에도 정통한 柳公權(778-865), 北海郡 太守를

    지낸 李邕(678-747), 海州 사람으로 알려지고 起居舍人을 지낸 吳通玄,

    翰林承旨를 지낸 吳融, 太子少师를 지낸 楊凝式(873-954), 中書堂吏를

    지낸 孫昭祚, 端明殿學士를 지낸 蔡京(1047-1126), 參知政事를 지낸 宋

    綬(991-1040), 端明殿學士를 지낸 蔡襄(1012-1067), 太常博士를 지낸

    李建中(945-1013), 大理評事를 지낸 蘇舜欽(1008—1048), 蔡京의 동생이

    자, 王安石의 사위였던 蔡卞(1048-1117), 劉正夫(1062-1117), 杜衍

    9978-1057)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무신 및 장군 유형에서는 謝安(320-385), 王徽之(338-386), 諸葛亮

    (181-234), 索靖(239-303), 張旭(675-750), 右卫胄参军을 지낸 孫過庭

    (646-691), 錢鏐(852-932) 등이다.

    승려는 智永, 懷素(725-785), 亞棲, 貫休(823-912), 應之, 法暉 등이

    고, 도사 및 신선은 陶弘景(456-536), 行尙書戶部侍郞․廣成先生․上柱

    國․蔡國公이라고 불리는 杜光庭(850-933), 梁元一, 북송의 저명한 도

    교학자인 陳景元 등을 살필 필요가 있다.

    화가 및 전문서예가로는 太常卿을 지낸 張芝, 書聖이라고 칭하는 王

    羲之(303-361), 劉瑉, 韋榮宗, 서화 이론가로 더 잘 알려진 張彥遠

    (815-907) 등이 있다. 여기서 王羲之는 동진 시기 우장군을 지낸 무신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선화서보에서의 王羲之의 특출하고 전문적인 서풍에 대한 기록, 작품 수, 후대 서예계에 끼친 영향

    력, 서풍의 확립 등에 의해 그를 전문서예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劉

    瑉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찾기 힘들지만, 선화서보의 기록에 의하면,王羲之와 王獻之 서풍의 유행 이후 특출한 서예가가 나타나지 않았는

    데, 劉瑉은 당시 제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세속적 서풍의 오류를

    한 번에 교정할 정도의 수준을 구비하고 있었다8)고 한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6시인 및 문학가로는 謝靈運(385-433), 李白(701-762), 白居易(772-

    846), 司空圖(837-908), 羅隱(833-909)이 있다.

    여성 및 기생 그리고 여선은 詹鸞, 당대 창부였던 薛濤, 西山 吳眞君

    의 딸이라고 불리는 여선 吳彩鸞이 있다.

    그 외 유형으로는 陳叔懷, 胡季良, 李景, 五代十国시대의 南唐 国君

    이었던 李煜 등을 탐구할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주목할 인물들이 많은 관계로 필자는 이 연구를 파트

    (1), (2)로 나누어서 논구해 보고자 한다. 전자는 선화서보에 담긴 인물들의 심미창조의 가능성 및 인재관이며, 후자는 이러한 인재관의 본

    질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엄밀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는 전자에 해당하며, 198인 가운데에 대표적 서예가들의

    평론을 발췌하여 그들의 심미창조의 가능성 및 인재의식에 관하여 탐

    구해 볼 것이다.

    Ⅲ. 심미창조 주체로서의 예술가

    玄宗(712-756) 李隆基(685-762)는 서예예술의 전통적 관습에 대해

    새로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폐단이 翰林院에 있다고

    보고, 파생된 문제점 및 세속적 경향에서 탈피하려고 시도한다. 그 예

    로 玄宗은 전통적 기법의 서체에 국한하지 않고 스스로 글씨를 연구하

    여 그 모순점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9) 이러한 점은 북송 英宗(1032-

    1067)의 네 번째 아들이자 徽宗의 숙부였던 益端献王 赵頵에게서도 살

    필 수 있다.

    필묵 연구에 대해서는 비백서, 전서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唐

    8)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2), pp.303-304.9) 李正美,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中國史硏究 82, 中國史學會, 2012), pp.10-11.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47元度와 夢英이 만든 篆籀十八體를 본받아서 여러 서체와는 다른 八體를

    만들었는데 사대부들이 그것을 대부분 계승받았다. 일찍이 6폭의 비단에

    글자 한 자를 쓴 적이 있는데, 필력이 신준하여 학문이 깊지 않으면 이를

    수 없는 경지였다.10)

    赵頵는 전통적 기법을 계승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서체를 심

    도 있게 연구한다. 그리하여 唐元度와 夢英이 만든 篆籀十八體를 능가

    하는 八體를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예술 애호 및 심미적 기질은 서예

    뿐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발휘한다. 선화화보에 기록된 그의 묵죽70첩 및 평가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11) 그의 묵죽화는 마치

    오래된 화공의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였다12)고 하는데, 이러한 평이 무

    색하지 않을 그의 실존 작품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

    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赵頵는 전통적인 기초 위에 새로운 것을 창

    출하려는 서예의 창조성 추구에 심혈을 기우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다. 이는 그의 심미 창조 가능성 및 발전적 측면을 가늠하게 한다.

    반면에 鍾繇(151-230)는 앞의 두 인물보다 더 이른 시기의 인물이지만,

    그의 서풍에 대해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참고 자료가 있다. 太傅

    을 지낸 鍾繇는 해서, 예서, 행서, 초서, 팔분서를 모두 쓸 수 있었으

    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그는 당시 무모한 상황을 연출할 정도로 서

    예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鍾繇는 초창기에 韋誕(179-253)이 계승한 蔡邕(133-192)의 筆法을추구하려 했지만, 韋誕은 이를 숨기고 鍾繇에게 전습시키려 하지 않는다.

    鍾繇는 매일 가슴을 치며 격분하면서 피를 토하며 거의 죽기 직전에 이

    르게 되자, 魏나라 太祖는 五靈丹으로 그를 구한다. 이후 韋誕이 세상을

    떠나고 鍾繇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蔡邕의 筆法을 획득함으로써 그의10) 宣和書譜 卷2, 篆書 : “嘗效唐元度․夢英作篆籀十八體, 又復出衆體之外作八體, 學者多宗之. 嘗盡六幅絹作一字, 筆力神俊, 非積學不能至此.”

    11) 宣和畵譜 卷20, 親王赵頵 : “平居之時無所嗜好, 獨左右圖書, 與管城毛穎相周旋. 作篆籀飛白之書, 而大小字筆力雄俊. 戲作小筆花竹蔬果, 與夫難狀之景, 粲

    然目前. 以墨寫竹, 其茂梢勁節吟風瀉露拂雲篩月之態, 無不曲盡其妙. 復善鰕魚蒲

    藻, 古木江蘆, 有滄洲水雲之趣, 非畫工所得以窺其藩籬也.”

    12) 宣和書譜 卷2, 篆書 : “復善畫墨竹, 如老師匠.”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48서예는 더욱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온종일 쉬지 않고 자기 직전까지도 손

    을 이용하여 이불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이불이 구멍이 뚫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서예가 王羲之, 王獻之, 索靖, 衛瓘과도 비교될 수 있는 것이

    다. 예컨대 에서 劉禹錫(772-84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王

    朗은 문장을 만들며 梁鵠은 글씨를 쓰고 鍾繇는 글씨를 새기니, 세상에서

    는 이들을 ‘三絶’이라고 칭한다.” 이는 곧 鍾繇가 필획에 모두 능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

    蔡邕의 筆法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또 韋誕의 무덤까지 파헤칠 정도의 예술에 대한 애착은 鍾繇의 생존원리와 가치관이 문화예

    술에 많이 치중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서예에

    서의 필획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치열함 때문인지, 그는 서예로 정평이 난 王羲之, 王獻之, 索靖, 衛

    瓘와도 비교될 수 있었으며, 당시 ‘三絶’이라고 일컫는 시문의 대가들

    과도 나란히 견줄 수 있어서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 해 줄 다음의 은 鍾繇의 서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이다.

    三希堂法帖(1) 魏鍾繇薦季直表

    출처: 臺灣國立故宮博物院, 故宮書畫檢索資料

    13) 宣和書譜 卷3, 正書 : “繇初求蔡邕筆法於韋誕, 誕祕而不傳, 輒搥胸嘔血, 幾至於斃, 魏太祖以五靈丹救之得活. 及誕死, 繇盜發其塚, 遂得邕法, 於是學書益進.

    雖窮晝夜無少間輟, 臥則以手畵被, 被爲之穿, 故其書遂與羲獻索衞相後先. 若魏受

    禪碑, 劉禹錫言, “王明爲文, 梁鵠作字, 鍾繇刻石, 世爲‘三絶’. 則繇濳心字畵可知

    矣.”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49

    은 비록 건륭제가 鍾繇의 글씨를 임모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이 鍾繇의 심미관 및 예술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중요

    한 자료라고 평가한다. 원대 서화가 陆行直(1368-1398)와 명대 사학자

    王世贞(1526-1590)은 鍾繇의 글씨의 탁월함과 신묘함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청대 劉熙載는 鍾繇와 張芝의 글씨에 대해 다

    음과 같이 평했다.

    鍾繇의 글씨를 평하는 사람은 그의 글씨는 덕이 풍족한 군자와 같아

    어리석은 용모와 같다고 하니, 이는 알기 쉬운 말이다. 張芝의 글씨를 평

    하는 사람은 그의 글씨가 짐을 보내고 집을 세움에 있어서 더하지도 않

    고 덜할 수도 없다고 말하니 이는 알기 어려운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鍾

    繇의 글씨를 연구하여 拙한 가운데에서 취향을 얻을 수 있다면, 또한 점

    차로 張芝의 펼친 글씨 가운데에서 법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14)

    위와 같은 자료들의 고증으로 미루어 볼 때, 梁武帝 萧衍(464-549)

    이 鍾繇의 글씨는 마치 하늘과 구름 위에서 학이 소요하고, 기러기 때

    가 물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15)고 하여 표일하는 듯 조밀한 아름다움

    이 배여있다고 한 평가의 진위성을 뒷받침해 주고, 나아가 鍾繇의 서

    예에서 인격성을 구비한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한시대에 이 같은 탁월한 심미관을 가진 鍾繇가 있었다면, 당 중

    기에는 李陽冰(713-741)이라는 서예가를 주목할 수 있다.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 李斯(서기280-208)의 와 공자의

    를 보게 되자, 그들의 필법을 본받아서 변화무쌍하게 되니

    자연히 특출한 서예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는 본래 字學을 연구하였

    는데, 점획을 분석하여 筆法論을 만들었다. 그는 또 이와 관련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天地山川에서 각지며 둥글고 흐르는 듯 대치하는 모습을

    얻고, 日月星辰에서 경위(구조)와 소회(회전)의 법도를 얻었다. 가까이는

    14) 劉熙載, 藝槪 書槪 : “评钟书者, 谓如盛德君子, 容貌若愚, 此易知也 评张书者, 谓如班输构堂, 不可增减, 此难知也. 然果能于钟究拙中之趣, 亦渐可于张得放

    中之矩矣.”

    15) 宣和書譜 卷3, 正書 : “梁武帝亦謂, 如雲鶴遊天, 羣鴻戲海.”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50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만물에서 취하였으며, 아득하게는 귀신의 정상에

    이르고 구체적으로는 희노애락의 서참(복잡함)에 이르기까지 글씨에 담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오독

    한 것이 많게 되자, 그 의의와 이치를 모두 잃게 되었다. …… 李陽冰은

    설문 30권을 개정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창힐의 후세라고 가리킬 수 있을 정도로 그것에 담긴 의미에 대해 자랑스럽

    게 여겼다.16)

    李陽冰 역시 李斯와 공자와 같은 선현들의 필법을 본받아서 이론적

    바탕을 이루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탁월한 학습 효과를 얻는다. 예컨

    대 그의 筆法論은 선현들의 필법에서 취한 문화적 가치관과 우주만물의 자연의 이치를 통해 깨달은 결과물로써, 이 같은 전문적인 학식

    및 기술은 그의 글씨와 심미적 기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전서는 이러한 미래지향적인 문화적 가치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이

    다. 舒元與(791-835)는 玉筋篆志에서 李陽冰의 서체는 격조가 높으며 힘찬 필력을 갖추고 있는데, 특히 秦의 李斯보다 더욱 빛나고 성대

    하다. 이는 진정으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우리 당대의 길조가 아닐 수

    없다17)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이 무색하지 않은 다음의 작품은 李陽冰

    이 전서로 쓴 를 탁본한 것이다. 이는 송대에 다시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여전히 그의 창조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이다. 선화서보에서 벌레 먹고 새가 조은 흔적의 형상은 그의 독특한 필법에서 바람이 불고 사람이 밀집한 것과 같은 것으로, 그의 빠른

    필세를 말하며, 용쏟아 오른 보검을 거꾸로 든 것과 같은 필획은 예리

    함을 말하고, 崇山과 華山의 크고 높은 형상과 같은 그의 필획은 험준

    함을 말하니 진실로 지나치게 평하는 것이 아니다18)고 하였다. 이러한

    16) 宣和書譜 卷3, 篆書 : “迨三十年, 初見李斯與仲尼,遂得其法, 乃能變化開合, 自名一家. 推原字學, 作筆法論, 以別其點畵. 又嘗立說, 謂於天地山川得其方圓流峙之形, 於日月星辰得其經緯昭回之度, 近取諸身, 遠

    取萬類, 幽至於鬼神情狀, 細至於喜怒之舒慘, 莫不畢載. …… 其自許愼至此, 作刊

    定三十卷, 以紀其學, 人指以爲蒼頡後.”

    17) 宣和書譜 卷3, 篆書 : “舒元輿作 玉筯篆志亦曰, 陽冰之書, 其格峻, 其力猛, 其功備, 光大於秦斯倍矣. 此直見上天以字寶瑞吾唐.”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51

    李陽冰三墳碑출처: 中國書法名家藝術館, http://bbs.china-shufajia.com/thread-372603-1-1.html

    평을 그대로 감지할 수 있는 는 그가 왜 당대에 전서로 정평이

    났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서예는 용필과 결구 두 방면에 정통해야만 최후의 목적인 창조성에

    다다를 수 있다.19) 이 말은 앞서 종요가 채옹의 필법을 얻고자 목숨을

    내 건 치열함에서도 엿 볼 수 있듯, 서예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같은 경지에 이르면 임모의 학습 과정을

    거쳐 마음이 가는대로 손놀림을 할 수 있는 창조적 행위와 사유를 펼

    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물론 이러한 경지는 앞서 인용문에서도 제시

    18) 宣和書譜 卷3, 篆書 : “議者以蟲蝕鳥跡語其形, 風行雨集語其勢, 太阿龍泉語其利, 嵩高華嶽語其峻, 實不爲過論.”

    19) 鄭誦先 著, 곽노봉 譯, 중국서예논문선, (동문선, 2000), p.309.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52하고 있듯, 서예의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적, 이론적 바탕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창조적이고 탁월한 심미관을 갖춘 또 한명의 인재가 있

    으니, 바로 해서로 이름이 난 徐浩(703-782)이다.

    왕은 徐浩에게 주목하니 그는 무한한 은총을 받는다. 徐浩의 부친 徐

    嶠之는 글씨가 뛰어났는데, 그는 모든 기법을 아들에게 전수하였다. 그리

    하여 徐浩의 글씨는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를 통해 法書論을편찬할 수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병풍 42폭에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여덟 가지 서체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초서와 해

    서가 가장 뛰어났다. ······ 徐浩의 글씨에서는 붓 끝에 그림의 솜씨가 숨

    겨져 있어 필력이 글자 바깥으로 드러났으며 잘된 부분은 왕왕 왕헌지와

    비슷하여 개원연간 이래로 비교될만한 사람이 없었다. 를 매

    우 공들여 적었는데, 그 무렵 장안의 흥경지 서남지역에서 황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그 약탈로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다.20)

    徐浩는 앞서 논한 서예가들과는 다르게 아버지 徐嶠之에게서 필법

    을 전수 받아서 자신만의 탁월한 글씨와 法書論이라는 이론서를 정립할 수 있었다. 에서 정교한 풍격을 나타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하며, 또 그 필이 마치 王獻之의 글씨에서 엿 볼 수 있는 다

    부진 면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그의 경지가 어는 정도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은 유실되었지만, 선화서보에도 기록되어 있듯, 필력에서의 강건함은 마치 화난 사자가 돌을 후벼 파는 것과

    같고, 웅건함은 좋은 말이 솟는 샘물로 갈증을 적시는 것과 같다고 하

    였는데,21) 22)에서 이러한 풍격을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은

    20) 宣和書譜 卷3, 楷書 : “帝喜之, 寵絶一時. 浩父嶠之, 善書, 初以法授浩, 浩益工, 撰法書論一篇, 爲時楷模. 嘗書四十二幅屛, 八體皆備, 草隷尤勝. ······ 蓋浩書鋒藏畫心, 力出字外, 得意處往往近似王獻之, 開元以來未有比者. 寫甚工, 頃長安興慶池西南, 巢賊之亂, 兵火剝壞, 無復存者.”

    21) 宣和書譜 卷3, 楷書 : “論者謂其力如怒猊抉石, 渴驥犇泉. 蓋浩書鋒藏畵心.”22) 는 宣和書譜에 기록된 송대 어부소장 작품 세 점 중 하나이며현재는 타이페이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묵적은 鮮於樞(1246-1302),

    張斯立 등에게 전해져 1303년에 張晏이 제발한 흔적이 있다. 이후 명대 韓世

    能, 韓逢禧 두 부자에게 전해져서 1604년 동기창도 제발하였다. 후에 몇몇 소

    장가에 의해 소장되었다가 乾隆內府에 보관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53세로 27센티미터, 가로 185.8센티미터로 다음의 은 전체의 왼쪽

    부분에 해당한다. 글씨가 강직된 느낌이 들지만 부드럽고 강건하면서

    도 정교함이 배어있다.

    快雪堂法帖(2) 徐浩朱巨川告

    출처: 臺灣國立故宮博物院, 故宮書畫檢索資料

    袁昻은 徐浩의 글씨가 南岡의 사대부들과 같아서, 그 무리들이 숭상

    하는 풍격으로 결국은 부족함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여 그의 천재적 기

    질이 부족하다23)고 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후세의 인재 교육을 위해 이론서를 집

    필하고, 옛 선현들의 정통적인 가르침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많이 담으

    려 했으며,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서예의 법도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과 이론적 사유에서도 알 수 있듯, 徐

    浩는 서예 이론 및 작품에서의 구조적 사고의 틀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창조적 심미관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

    통 문화예술에 대한 심미적 사고, 감정 및 행동 등을 통해 융합적 실

    천을 이룩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도사 杜光庭(850-933)

    이다.

    3>은 佩文齊書畵譜에 기록된 나머지 두 점과 다른 작품이며,이 두 점은 당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서예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23) 宣和書譜 卷3, 楷書 : “袁昻嘗評其書, 謂如南岡士大夫, 徒好尙風範, 終不免寒乞. 以浩書殊乏天才, 而窘在繩律故爾.”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54懿宗 李漼(833-873)은 萬言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선발했는데, 杜光庭은

    이 시험에서 선발되지 못하자, 관모를 쓰고 의관을 갖춘 유학자의 염원을

    포기하고, 도교에 귀의하여 학문을 추구하였다. 사리가 밝아 세상에 대한

    물욕이 없었으며, 꾸준한 연구를 지속하여 도가 서적을 저술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정세한 이치가 많이 내재되어 있었다. 도교에서의 신조와 계율

    을 조목조목 나누어 열거하였으며, 漢代의 張道陵(서기34-156)에서부터

    魏晉南北朝시대 宋나라의 陸修靖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

    이 없었다. 그리하여 도사들은 그를 숭상하였다. 僖宗 李儇(862-888)이 즉

    위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는 왕의 명으로 麟德殿을 맡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한 순간에 동료들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러면서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에 정통하고 다채로운

    문장이 만대에 퍼지며, 근본을 세우고 교화를 이루는 인물은 온 세상에서

    杜光庭 한 사람뿐이다. 그는 混元圖, 紀聖賦, 廣聖義曆帝紀와 시가잡문 등 100여 권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자신이 기록하고 편찬한 모든 시

    문은 해서로 쓰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다투어 얻으려 했

    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는 시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주목할 점

    은 그의 작품에서 자연의 정감이 느껴지는데, 비록 王羲之, 王獻之 부자

    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일반인보다 속되지 않으며 뛰어난 것도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24)

    杜光庭은 당말 오대 도교사상의 발전적 성과를 이룩한 도교 문파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대표작인 道敎眞經廣聖義에서는 각각의 도교 문파의 교리를 한데 융합한 사상적 특징을 살필 수 있으며, 유․불․도

    삼교사상의 정화를 모두 섭렵해 도교의 이론적 사유 수준을 제고시켰

    다.25) 특히 漢代의 五斗米敎의 창립인인 張道陵에서부터 魏晉南北朝시

    대 宋나라의 陸修精에 이르기까지의 도교의 신조와 계율을 상세히 기

    록한 사실과 시가, 잡문 등의 저술 및 집필에 각고의 학문적 노력을

    24) 宣和書譜 卷3, 楷書 : “懿宗設萬言科取士, 光庭試其藝不中, 乃棄儒衣冠人道遊. 意淡漠, 著道家書頗硏極至理, 至條列科敎自漢張道陵曁陸修靖撰集已來, 始末

    備盡, 於今羽流成宗之. 僖宗臨禦, 光庭始充麟德殿文章應制, 一時流輩爲之斂衽,

    皆日學海千尋, 辭林萬葉, 僖宗立敎, 海內一人而已. 嘗撰曁歌詩雜文僅百餘卷. 喜自錄所爲詩文而字皆楷書, 人爭得之, 故其書

    因詩文而有傳. 要是得煙霞氣味, 雖不可以擬倫羲獻而邁往絶人, 亦非世俗所能到

    也.”

    25) 孫亦平, 論杜光庭的三敎融合思想及其影響 (中國哲學史 4, 2006) pp.99-104.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55추구한 점은 다양한 재능 발휘를 통한 탁월한 인재의식과 심미적 가능

    성을 엿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서보에 기록된 의 실존 여부 및 그의 다른 해서 작품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명대

    謝肇淛(1567-1624)의 滇錄에서는 杜光庭이 거주한 곳은 滇(오늘날의운남성)이며, 일찍이 를 쓴 적이 있는데, 그 기법이 정교

    하고 신묘하다26)고 평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전적 여부는 실제

    로 존재했으며, 또 글씨가 뛰어났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또 인용문

    에서도 비록 王羲之, 王獻之와는 비교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일반인이

    넘다들 수 있는 세속적인 경지는 아니라고 한 점도 그의 수준을 가늠

    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해서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다양한 학문

    적 성취 및 융합적 사고를 지닌 또 다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북송

    의 문신 蔡襄(1012-1067)이다.

    그는 글씨가 뛰어났으며, 지속적인 연구로 인해 옛 선현들과 나란히

    견줄 수 있게 되었다. 큰 글자는 대범하게 썼으며 작은 글자는 세밀함이

    마치 솜털과 같이 써서, 筆勢는 힘이 있고 結構는 적합하였다. 큰 글자는

    結構의 엄밀함을 잃지 않고, 작은 글자는 간격의 일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科斗, 篆籒, 正隸, 飛白, 行草, 章草, 顚草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행서에 뛰어났는데, 선배들

    의 글씨 가운데에서 스스로 일종의 풍격과 정취를 취하였다. 그 필세는

    매우 힘이 있으며 글자의 자태는 고아서 또 다른 풍미가 느껴졌는데, 仁

    宗도 그의 글씨를 애호하였다. 황제가 만들었던 隴西王李用和(988-1050)

    의 묘지 銘文을 蔡襄에게 쓰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사가 쓴 溫成

    皇后의 銘文도 그에게 쓰게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待

    詔가 할 일입니다. 사대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취미이며 소일거리로 쓸 뿐입니다.” 仁宗(1010-1063)은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금을 통틀어 자신의 글씨를 아낄 줄 아는

    자는 오직 王獻之와 蔡襄 뿐이라고 하였다. 蔡襄은 쉴 때면, 편안하게 차

    를 즐겨 마셨는데, 그리하여 茶錄 上․下를 집필하고, 荔枝譜도 썼다.27)

    26)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p.100.27) 宣和書譜 卷6, 楷書 : “工字學, 力將求配古人. 大字巨數尺, 小字如毫發, 筆力位置, 大者不失結密, 小者不失寬綽. 至於科斗篆籒正隸飛白行草章草顚草, 靡不

    臻妙, 而尤長於行, 在前輩中自有一種風味. 筆甚勁而姿媚有餘, 仁祖深愛其書, 嘗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56

    蔡襄은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쓸 때, 대범함과 세밀함의 조화를 이

    룰 수 있는 인물로서, 용필과 결구 두 방면에 모두 능한 창조성을 구

    비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옛 선현들의 글씨에서 일종

    의 성공비결을 추구하여 得筆하였는데, 전통적인 임모의 과정을 거쳐

    창신의 예술화로 나아간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예뿐만이 아니라, 茶의 감식 및 제조법에도 상당한 조견을

    구비한 것으로 보인다. 茶錄 上에서는 分色, 香, 味, 藏茶, 炙茶, 碾茶, 罗茶, 侯茶, 熁盏, 点茶과 같은 차에 대한 품질 및 끓이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下에서는 分茶焙, 茶笼, 砧椎, 茶铃, 茶碾, 茶罗,

    茶盏, 茶匙, 汤瓶과 같은 茶器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28), 茶錄 上․下뿐만 아니라, 荔枝譜에서도 그의 차에 대한 고견과 서풍의 심미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그가 다양한

    재능을 구비한 심미 창조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仁宗과의 대화에서 전문적인 서예 수준을 남용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줄 알았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자신의 예술적 우수성을 공적인 일

    에 남용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심미적 안목과 경지는 선현의 우수

    한 학문적 성과 및 창조적 사고에서 발휘된 것이며, 나아가 자신만의

    탁월한 미적 성과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심미관 및 실천

    적 사유는 앞서 언급한 茶錄 上․下, 荔枝譜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대만고궁박물관에 소장된 大硏帖과 澄心堂紙帖에서

    도 고찰할 수 있다.

    蔡襄이 행서로 쓴 세로 25.6센티미터, 가로 25센티미터의 와

    1063년에 행서로 쓴 세로 24.7센티미터, 가로 27.1센티미터의 는

    그의 심미적 경지를 나타내는 대표작들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성취

    禦制元舅隴西王李用和墓銘詔襄書之. 已而學士撰溫仁皇后銘文, 又詔襄書, 而襄辭

    曰 此待詔職也. 儒者之工書, 所以自遊息而已. 仁祖亦不强之. 人謂古今能自重其

    書者, 惟王獻之與襄耳. 襄遊戲茗事間, 有前後 茶錄, 複有荔枝譜.”28) 郭丹英․曹灼, 邂逅千年茶器(下) -清雅集古·唐宋精品茶具賞析 (茶博覽

    11, 2012)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57는 사람들이 고금을 통틀어 자신만의 글씨를 아낄 줄 아는 자는 오직

    王獻之와 蔡襄 뿐이라고 한 점29)에서 그의 예술적 가치와 이론적 논

    리의 타당성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다.

    宋蔡襄大硏帖 宋蔡襄澄心堂紙帖

    출처: 臺灣國立故宮博物院, 故宮書畫檢索資料

    한편 이러한 다양한 이론적 사유 및 지성을 갖춘 또 한명의 인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사 陳景元(1025-1094)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도교 서적을 손수 베껴 썼으며,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그것

    을 술술 외웠다. 저술한 책이 10상자가 되면 모두 소장하였다. 귀한 손님

    이 오면 반드시 그것을 열어서 글 쓰는 공구를 손님 앞에 준비하고, (그

    가 쓴 글에서) 수정할 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이 같이 완벽해지기를

    즐길 뿐이었다. 그는 벗을 사귀는 것도 절제했으며, 일반인들과도 왕래를

    자주 갖지 않았다. 벗은 오직 善法云寺의 승려인 法秀(1027-1090)와 교류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廬山의 陸修靜와 惠遠이 교류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초창기 京師를 소요할 때, 醴泉觀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사람들

    은 그를 강연에 초대했다. 神宗은 그의 명성을 전해 듣고 그의 거처를 普

    天大醮에다가 세우라고 하며, 그에게 상서를 써서 올리도록 명령을 내렸

    다. 상서를 올리자, 神宗은 기뻐하며 칭찬하였고, 그를 天章閣에서 조견하

    고서는 질문에 묻고 답하자는 교지를 내린다. …… 己卯年 그는 아버지를

    장사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廬山으로 돌아가려 한다. 왕은 백금을 하사하

    29) 宣和書譜 卷6, 楷書 : “人謂古今能自重其書者, 惟王獻之與襄耳.”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58여 그를 돕는다. 그는 廬山으로 돌아갈 때 아무 짐도 없었으며, 짊어 진

    모든 것은 경사 서적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는 도교, 유교, 의학과 관

    련한 각종 서적이 수장되어 정리되어 있었으며, 사방에서 찾아 온 학자들

    은 그에게 배움을 청하였다.30)

    인용문에서 陳景元은 지식의 습득 및 학문적 성과를 위해 유․도

    관계 서적뿐만이 아니라, 의학 및 경사서적을 손수 베끼고 암기한 인

    물로 묘사되고 있다. 평소 절제된 생활을 한 그는 神宗(1067-1085)에

    의해 발탁되어 관직에 임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廬山

    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매진한다. 특히 그의 학문적 성과는 그의 일

    상생활에서도 알 수 있듯, 다양하면서도 대립적인 면을 학문적 융합을

    통해 실천한다. 그가 편찬한 道德真经藏室纂微에서 ‘道生萬物’과 ‘萬物獨化’라는 대립적 논점을 융화시키려는 특색 및 의지는 곧 이러한

    융합 실천의 의지로 나타난다.31) 그러나 이 두 사상의 논점은 본질적

    으로 서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陳景元은 시대적 조류의 영향

    인지 이 두 논점을 하나로 묶어서 해석하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주지하다시피 필자는 선화서보에 담긴 인물들 가운데에 융합적이면서도 실천적 사고와 창조적 심미관을 구비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

    했다. 이들은 물론 각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자신이 처한 각각

    의 사회적 영역에서 최선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진취적인 성향을 가

    진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들이 추구하는 심미창조의 가능성은 옛 선현

    들의 우수한 학문적 성과 및 문화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탁월

    한 인재의식은 특수한 심미적 기술 및 이론적․학문적 바탕에 근거한

    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30) 宣和書譜 卷6, 楷書 : “自幼喜讀書, 至老不倦. 凡道書皆親手自校寫, 積日窮年, 爲之佝僂. 每著書十襲藏之. 有佳客至, 必發函具鉛槧出客前, 以求點定. 其樂

    善不已複如此. 然不泛交, 未嘗與俗予將迎, 惟相善法雲寺釋法秀, 人比之廬山陸修

    靜交惠遠也. 初遊京師, 居醴泉觀, 眾請開講. 神考聞其名, 詔即其地設普天大醮,

    命撰靑詞以進. 卽奏, 稱善, 得旨賜對天章閣, …… 己卯, 乞歸廬山, 複以葬親爲請,

    詔賜白金助之. 卽歸, 行李無他物, 百擔皆經史也. 所居以道儒醫書各爲齋館而區別

    之, 四方學者來從其遊, 則隨所類齋館相與校讎, 於是人人得盡其學.”

    31) 尹志華, 北宋道士陳景元的老學思想新探 (世界宗敎硏究 1, 2004), pp.82-87.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59

    Ⅳ. 宣和書譜의 人才像중국 왕조시대의 조직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선화서

    보에서만 보더라도 크고 작은 사회 구성원들이 황실의 통치 아래 마치 피라미드 모형과 같이 조직적인 구조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세

    세한 직급과 지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

    다. 그러나 필자는 선화서보에 담긴 198인의 사회적 위치 및 신분을시대성, 평론 내용, 6서 등에 따라 크게 13개 유형으로 나누어 보았다.

    예컨대 황제․여제․왕족․부마도위․시인 및 문학가․문신 및 사대

    부․무신 및 장군․전문서예가․승려․도사․기생․여선 등이다. 여기

    서 이들의 시대적 특징, 인물의 성정, 사회조직과의 관계, 문화예술의

    식, 개인의 기호 등을 탐구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감식 능력 및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하며 육성하는 지혜를 알고자 함이

    다. 다시 말해 ‘知人’과 ‘用人’의 기술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선화서보에서는 이러한 인재관을 인식하고 주도한 주체를 황실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卷1에서 알 수 있듯, 12명의 역대 제왕들의 서예

    심미관은 심미창조에 핵심을 두고 있으며32), 그 가능성을 역대 대표적

    인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문화의식 및 성정, 기호 등을 통해 상세히 설

    명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에 王衍은 위진남북조시대 진나

    라 사람으로, 懷帝 司馬熾(284-313)을 보좌했으며 太尉를 지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남다른 세계관 및 가치관을 갖추어 山濤에 의

    해 그 됨됨이를 인정받는다.

    어떤 부인이 이러한 자식을 낳았을까! (그가) 성장하자 명성은 사방으

    로 퍼져 나갔다. 지혜롭기는 마치 신과 같으며, 스스로 자공과 견줄 수

    있다고 말하니, 명성은 날로 커져 세상을 뒤흔들었다. 사물의 名과 理에

    32) 李正美,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中國史硏究 82, 中國史學會, 2012), pp.5-26.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0대해 밝았으며, 노장의 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매번 일을 논할 때 합의

    를 보지 못하면, (그에 따라) 바로 응변할 수 있어서, 세상에서는 그를

    ‘口中雌黃’이라고 불렀다.33)

    顧愷之(348-409)의 에서는 王衍은 키가 크고 준수하여 마치

    벼랑의 석벽과 같이 높고 험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34)고 한다. 이러

    한 평가는 인용문에서 山濤가 王衍을 훌륭한 인재라고 평한 내용, 王

    衍이 스스로 자공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점, 그리고

    세상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의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사실

    을 함축적으로 뒷받침 해 준다. 그리고 그의 이 같은 인재의식의 원천

    은 경전 독해를 통해 획득한 학식 및 임기능변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口中雌黃’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주만물의 이치와 원리

    를 노장사상을 통해 통달하고 있었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이와 같은

    성정 및 학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武帝는 그에 대해 전해 듣고, 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지금 세

    상에서 너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王戎은 다음과 같이 대답

    한다. “당연히 옛 선현들 가운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

    로) 그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인물이 되었다. 합종연횡의 권

    술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했으며, 만년에는 세속의 일을 잊고 지냈는데,

    ‘재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오직 ‘阿堵物’이라고 말할 뿐이었

    다. 진나라 왕조 사대부들은 공담현리를 지극히 숭상하였는데, 王衍이 바

    로 그것을 선도한 인물이다.35)

    어찌 보면 王衍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스스럼없이 자신과 비교

    할 수 있는 인물이 옛 선현들 가운데에 있다고 하니, 세상사를 초월하

    고 공담현리를 숭상한 실천적 인물이었음을 가늠하게 한다. 특히 보편

    33) 宣和書譜 卷7, 行書 : “何物老嫗生寧馨兒. 及長, 聞譽四馳. 明悟若神, 謂可比子貢, 聲名籍甚, 傾動當世. 善談名理, 得莊老旨趣. 每論事有不安, 隨即更改, 世

    號口中雌黃.”

    34) 宣和書譜 卷7, 行書 : “顧愷之作, 亦稱衍岩岩淸峙, 壁立千仞.”35) 宣和書譜 卷7, 行書 : “武帝聞之, 問王戎曰 “衍於當世誰比?” 戎曰 “當從古

    人中求耳.” 其爲世所尙如此. 初好論從橫之術, 晩乃棄世事, 口不言錢稱‘阿堵物’而

    已. 晉室士夫雅尙淸談者, 衍爲之倡也.”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61적 사유의 범위 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세속적 범주 안

    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서보에서는 이러한 ‘남 다른’ 인재의식을 선악의 지표, 인간의 본성의 외표

    로 삼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특수한 성취 및 창조적인 인재 의식을 구비한 또 다른 인

    물이 있었으니, 바로 李白이다.

    어릴 적에는 曆書에 밝았으며, 성장한 후에는 검술을 좋아하였고, 용모

    는 준수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는 애주가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

    해서 세상에서는 ‘六逸’, ‘八仙’이라고 칭했다. 賀知章(659-744)은 李白을

    보자마자 ‘謫仙人’이라고 불렀으며 玄宗에게 천거한다. 일개 평민으로서

    玄宗을 조견하러 金鑾殿에 갔지만, 황제는 그를 위하여 마차에서 내려와

    맞이하였다. 마치 ‘商山四皓’에서의 東園과 綺裏季를 보는 것 같았다. 시

    세에 대해 논하고 외족의 國書에 회답해야 할 때, 李白의 붓은 멈추는 법

    이 없었다. 왕은 그를 갸륵하게 여겼으며, 당시 사람들도 그를 칭찬하였

    다. 얼마 후 황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자, 왕은 조서

    를 내려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그는 江左를 차마 떠나지 못하

    고 李陽冰에게 의지하며 청산 謝脁의 집을 좋아해서 평생을 여기에서 보

    내려는 생각을 한다. 맑은 강에 보름달 뜨니 늦은 밤에 배를 젓는구나,

    궁실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그 사이에 높은 소리로 노래 부른다. 세속을

    초월한 걸출한 인물이 확실하다. 당나라 사람 가운데에 杜甫의 詩歌를 넘

    어서는 자는 없었지만, 李白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하다. 그리하여

    그의 유명한 문장과 우수한 어휘는 필 끝에서 왕성한 기운을 볼 수 있었

    는데, 오래전부터 기세가 등등하여서 어찌 제약된 시문의 형식을 가진 자

    와 그 우수함을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36)

    李白은 ‘六逸’, ‘八仙’, ‘謫仙人’이라고 불리었으며 우리들에게는 시인

    으로 잘 알려져 있다. 賀知章과 玄宗은 그의 자유로우면서도 초탈한

    36) 宣和書譜 卷9, 行書 : “歲知通書, 及長, 好擊劍, 落落不羈束. 喜與酒徒縱飮,世有六逸八仙之目. 賀知章一見號謫仙人, 薦之明皇, 以布衣召見金鑾殿, 爲降肇步

    迎, 如見園綺. 論世務, 答蕃書, 筆不停輟, 帝嘉之, 以寶床賜食於前, 手爲和羹. 令

    待詔金馬門, 當時榮之. 未幾不爲親近所喜, 有詔放還. 裴回江左依李陽冰, 愛謝家

    山水, 有終焉之志. 澄江月滿, 拿舟夜渡, 著宮錦袍吟嘯其間, 端是風塵表物也. 唐

    人作詩未有如杜甫, 時白亦得差肩於甫. 至其名章俊語, 鬱鬱芊芊之氣見於毫端者,

    固已逼人, 是豈可與泥筆墨蹊徑爭工拙哉!”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2세계관 및 가치관을 알아보고 정사에 기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우수한 점은 종묘사직의 현실적 벽에 부딪친다. 인용문에서 “맑은 강

    에 보름달 뜨니 늦은 밤에 배를 젓는 구나”라는 구절은 李白 자신의

    당시의 현실적 처지를 잘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이백은 知己 의식37),

    다시 말해 사물 관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자신의 인생 가치를 표명하

    였고, 이는 더 나아가 시인으로서의 인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표출한

    것이었다. 이백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시를 지어 자신의 의식 세계를 나타낸다. 그는 자유롭

    지만 그 현실적 경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스란히 시에

    서 표출하고 있다. 특히 당시로서는 두보의 시가는 독보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수준은 그의 ‘남 다른’

    언어세계 및 의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이 같은 ‘남 다른’ 인재의식은 虞世南이라는 인물에서도 살필

    수 있다.

    虞世南의 외모는 마치 옷도 걸치지 못할 정도로 약해 보였지만 속은

    열정에 힘이 넘치는 인물로, 논쟁을 할 때는 공정함을 잃지 않아서 그 용

    기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唐 太宗 李世民은 그를 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虞世南과 함께 고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전이 한

    마디 실수를 하자, 일찍이 낙담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알린다. “虞世南은 세상 사람들을 초월한 인재이

    며, 다섯 가지 특유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정직하며 충성스럽다.

    둘째, 벗과 형제를 사랑한다. 셋째, 견문이 넓다. 넷째, 시부에 특히 뛰어

    나다. 다섯째, 서예가 훌륭하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에 하나만 갖추었더

    라도 충분히 명신이 될 자격이 있지만, 虞世南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

    다.” 그는 황제에게 이토록 주목을 받았다.38)

    虞世南은 위에서 묘사하듯 외유내강의 기운과 면모를 갖춘 인물이

    37) 李宇林, 論李白的人才意識 , (天水師範學院學報 29-3, 2009), pp.70-73.38) 宣和書譜 卷8, 行書 : “世南外若不勝衣而中抗烈, 論議持正, 氣無所屈. 唐文皇一見奇之, 嘗曰 與世南商略古今, 有一言失, 未嘗不悵恨. 乃詔曰 世南一人有出

    世之才, 遂兼五絶, 一曰忠讜, 二曰友悌, 三曰博聞, 四曰詞藻, 五曰書翰. 有一於

    此, 足謂名臣, 而世南兼之. 其器重如此.”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63었다. 송대 서예이론가 朱長文(1039-1098)도 虞世南에 대해서 찬미하

    였는데, 다음에서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그의 모습은 근엄한 유학자와 같고 밖으로는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지만 학식은 깊고 의론함에 있어서 바르며 조그마한 아부도 없이 정의

    에 항거하는 그의 바른 정신은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기

    운이 빼어나고, 색은 윤이 나면서 뜻하는 바와 붓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한 맛을 함유하고 법도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부드러우나

    함부로 되지 않았으니, 바로 그 사람됨과 같다.39)

    그의 글씨에서 나타난 기운과 먹색의 조화는 그의 사회적 포부와

    실천적 행위의 조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약한 모습에서

    비치는 내면의 강인함은 바로 그의 인격 정신과 내면 수양이 어느 정

    도 경지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주목할 점은 唐 太宗 李世民이 제

    시한 虞世南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신하로서의 자격을 이 다섯 가지의 사항에 빗대어 말한다. 첫째, 정직

    하며 충성해야 한다. 둘째, 벗과 형제를 사랑한다. 셋째, 견문이 넓어야

    한다. 넷째, 시부에 특히 뛰어나야 한다. 다섯째, 서예가 훌륭해야 한

    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춘 虞世南은 과연 인재 중의 인재였다.

    太宗은 중국 역사상 훌륭한 인재를 가장 많이 발탁하고 등용한 인

    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을 보좌할 인재는 현명함을 갖추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여겼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좋은 평가를 받는 그의

    ‘용인’과 ‘지인’의 기술은 그가 이룩한 역사적 업적을 통해서도 잘 알려

    져 있다.40) 따라서 이 평가 기준은 선화서보에서 논하고자 하는 인재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제시한 다섯 가

    지 人才像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도록 하자.

    첫째, 둘째는 오늘날 우리의 인재의식 가운데에서 윤리적․도덕적

    39) 朱長文, 續書斷: “世南貌儒謹, 外若不胜衣, 而中抗烈, 论议持正, 无少阿徇,其中抗烈, 不可夺也. 故其为书, 气秀色润, 意和笔调, 然而合含刚特, 谨守法度, 柔

    而莫渎, 如其为人.”

    40) 이에 대해서는 王平川, 唐太宗李世民人才觀述評 ((唐都學刊 16-2, 2000)를 참조.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4측면을 강조하는 일면이라서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셋째, 넷째,

    다섯째에서의 시부와 서예에 뛰어나고 견문이 넓어야 한다는 점은 오

    늘날 자본주의 국가의 현실에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생

    각해 볼 수 있다. 시부와 서화는 문예예술사상의 핵심이며, 이는 바로

    한 집단의 문화예술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과 집단사회에서의 문화 간 경계를 넘어 소통과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제고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수한 기술 및 탁월한 문화의식을 소유하려면 당연히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과감히 논단할 수 있는 역사성을 구비한 인물이어야 하며, 또

    이러한 인재를 육성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은 앞서 말했듯이 특수함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위정자가 그러하듯이 한 국가, 한 사회의 정치적 핵심은 ‘용인’

    과 ‘지인’의 기술을 통해 인사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서 살필 수 있듯이 항상 통치를 돕는 인재

    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황권 중심의 독재체재의 병폐는 바로 이러한

    인재 등용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조건적 상황이 쉽게

    연출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간신무리가 발탁되면 그 조직체계는 이미

    수명이 다한 동식물과도 같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간신무리에 속하는 인물도 선화서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살펴보도록 하자.

    翰林에 발탁되어 교지를 받들게 된 이후로부터 앞뒤 세 명의 재상은

    정무 수행의 명령으로 공경을 받으니 국정을 장악한다. 실로 국가의 좌우

    를 보필하는 임무를 수행하니 만백성이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나라의

    큰 일을 결정하거나 대의를 건의할 때면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함부로

    주장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담소를 나눌 때는 너그럽고 관대했다.41)

    41) 宣和書譜 卷12, 行書 : “自擢翰林承旨, 前後三入相位, 寅亮燮理, 秉國之鈞,實維阿衡, 民所瞻仰. 至於決大事建大議, 人所不能措意者, 笑談之間, 恢恢乎其有

    餘矣.”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65

    蔡京(1047-1126)은 經史에 능통하고 서예와 시문도 뛰어나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42)고 한다. 이러한 그를 大丞相 王畦가 알아보고 천

    거한다.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그 앞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주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장악한 사실은 그

    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실을 대변해 준다. 또 이

    러한 권력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집권 남용을 할 수 있었을 지도 짐작

    이 간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간신이라고 혹평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

    지 않는다. 이는 선화서보 집필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이 집필에 그가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평가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인간의 성정의 겉과 속은 판

    별하기 쉽지 않다. 또 시대가 급변하는 상황 일수록 그것을 읽어내고

    결정내리기란 속이기보다 더 어려운 과제이다.

    Ⅴ. 맺음말

    선화서보에 담긴 인재의식 및 심미 창조의 가능성은 오늘날의 사회현상과 인맥의 구조체계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현

    명하고 유능한 인재는 많지만 어떠한 인재가 어떠한 리더를 만나느냐

    에 따라 그 집단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며, 또 이러한 인재를 육성하는

    원천 소스는 바로 그들이 속한 집단의 문화의식 수준과도 직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지인’과 ‘용인’의 기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쓰임

    새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때 그 효과가 최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탁

    월한 기술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큰 틀 안에서 융합을 이

    룰 때, 조화롭고 통합적인 사회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

    한 역량은 선천적인 부분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대부분이 후천적 인재

    42) 宣和書譜 卷12, 行書 : “博通經史, 揮灑篇翰, 手不停綴.”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6육성을 통해 그것의 발전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앞서 3, 4장에서 고찰해 보았지만, 사회의 심미창조 융합은 그 특수

    성이 인정될 수 있는 문화의식의 보편성이 전제될 때 가능한 점을 주

    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국가에 요구하는 살기 좋은 사회, 공정한 사회는 다

    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도외시하는 문화의식의 고갈로 인해

    그 곳의 면모가 몽롱해져 있을 뿐이다. 각종 디지털 미디어의 남용, 시

    비가 엇갈린 부정부패의 기준, 교육정책의 인성 부족 딜레마, 윤리의식

    결함으로 인한 선악의 또 다른 지표 등 우리는 많은 문제점을 어쩌면

    최고의 리더, 최고의 인재를 통해 소통하고 정합하려는지도 모른다. 그

    리고 그것을 너무나도 염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바란다고 해서

    다 이룰 수 있으며, 또 완성된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서보에 담긴 인재상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각할 여유를 안겨준다. 여기에 담긴 옛 선현들의 문화적 가치관

    및 심미의식 등은 어찌 보면 수천 년 전의 아득한 전설과도 같을 수

    있으며, 또 먼 이국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심미창조를

    추구하는 우리들의 문화의식의 제고가 과연 허구적 담론에 불과 한 것

    일까?

    앞서 198인의 인물들 가운데에서 심미창조의 실천 및 그 가능성이

    돋보이는 대표적 서예가들을 고찰해 보았다. 그들은 황권중심의 구조

    체계 아래 각계의 조직 구성원들의 일부였으며,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그들의 사회적 관계 및 일상생활은 바로 그들이 속한 집단의 경

    쟁력을 제고시키는 핵심이었으며, 이러한 문화의식의 뿌리는 바로 집

    합적 사고관이 아니라 ‘남 다른’ 특수성을 가진 인물을 인정하고 있다

    는 점이다.

    시대와 문화 배경이 다르고 사회집단의 틀이 다른 구성원들이 하나

    의 거대한 선한 목표 의식이 있다면, 그 사회는 미래지향적인 발전 방

    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또 문화의식을 제고시킬 수 있는 의사

    소통의 기술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해도 그 특수성을 인정할 수 있는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67최선의 사회라면, 오늘날 인간의 성정을 쉽게 판별하기 어려운 시대의

    난관을 현명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쓸 수

    있는 원천은 우리의 창조적인 문화의식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리더, 최고의 인재가 해소 시켜줄 사항이라고 간주하기 보다는

    개개인의 사유 및 경험, 그리고 지혜를 통해 소통하고 정합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몇몇의 리더와 인재가 갖춘 최상의 문화의식을 통해

    문제점을 해소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특수하고 개성 있는 창의

    적 문화의식을 통해 많은 문제점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단순한 집합적 사고에 침잠되어 있는 개인주의

    와 잠재적 폭력의식을 버리고 각자의 재질을 발견하고 지혜로운 사고

    를 발휘할 수 있도록 창조적 사유의 창문을 열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공구서, 원전, 주석서 및 관련 사이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中國書法名家藝術館

    臺灣國立故宮博物院, 故宮書畫檢索資料

    桂第子 譯注, 宣和書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2 2次 印刷)岳仁 譯注, 宣和畵譜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2; 2002 2次 印刷)朱長文, 續書斷 (水采田 譯注, 宋代書論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6, 5次印刷)

    陳思, 書小史 (水采田 譯注, 宋代書論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1999; 2006, 5次印刷)

    劉熙載, 藝槪 書槪 (潘運告ㆍ譯注, 晩淸書論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4;2006, 3次印刷)

    2. 단행본

    이정미, 宣和畵譜의 예술사상 ((주)한국학술정보, 2012)鄭誦先 著, 곽노봉 譯, 중국서예논문선, (동문선, 2000)

    3. 논문류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68이정미, 宣和書譜의 書藝分類史觀 , (中國史硏究 77, 中國史學會, 2012)이정미, 宣和書譜에 담긴 帝王들의 서예심미관 (中國史硏究 82, 中國史學會, 2012)

    秦琴, 李煜書學思想硏究 (美育, 科敎文化, 2010)候姸姸, 南唐後主李煜的書法成就述考 (蘭臺世界, 歷史硏究, 2012)李尚軍, 不輸文采獨領風騷 - 唐太宗的書藝․書論及其書史貢獻 (書法藝術 2,

    1996)

    孫亦平, 論杜光庭的三敎融合思想及其影響 (中國哲學史 4, 2006)郭丹英․曹灼, 邂逅千年茶器(下) - 清雅集古·唐宋精品茶具賞析 (茶博覽 11,

    2012)

    尹志華, 北宋道士陳景元的老學思想新探 (世界宗敎硏究 1, 2004)李宇林, 論李白的人才意識 , (天水師範學院學報 29-3, 2009)王平川, 唐太宗李世民人才觀述評 ((唐都學刊 16-2, 2000)

  • 宣和書譜에 담긴 人物論 探究(1) (李正美) 69(Abstract)

    A Study on Personalia in Xuan He Shu Pu

    Lee, Jung Mi

    The Northern Song dynasty was highly influenced by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nd therefore extensively

    introduced the cultural values of the three religions and the ensuing

    aesthetic outlook and philosophies into its arts, which laid the

    foundation for the modern thought represented by humanism and

    the Renaissance. In the meantime, a variety of theories and

    knowledge culture and art, related to culture and art, was

    accumulated and systematized, which enabled the active publication

    of literary reviews with respect to the thought of the then nobility,

    the subject of humanism in East Asian countries, and its theoretical

    value. ‘六一論書 (Liu Yi Lun Shu)’ and ‘集古錄 (Ji Gu Lu)’ written

    by Yang-xiu Ou (1007-1072), ‘東坡論書 (Dong Po Lun Shu)’ written

    by Shi Su (1037-1101), ‘續書斷 (Xu Shu Duan)’ written by

    Chang-wen Zhu (1039-1098), ‘山谷論書 (Shan Gu Lun Shu)’ written

    by Ting -jian Huang (1045-1105), ‘海岳名言 (Hai Yue Ming Yan)’

    written by Fei Mi, ‘宣和書譜 (Xuan He Shu Pu)’ published in ‘徽宗

    宣和年間 (Hui Zong Xuan He Nian Jian)’ and ‘廣川書跋 (Guang

    Chuan Shu Ba)’ written by You Dong can be cited as the

    examples. In particular, the publication of ‘宣和書譜 (Xuan He Shu

    Pu)’ was written under the leadership of the secretariat, unlike other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70contemporary publications. It deals with 198 artists, along with their

    characters, works and theoretical backgrounds related to artistic

    merits arranged in the chronological order, and with the originals

    and modified styles of handwritings classified by the six books. It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and systematization of knowledge

    and theories relevant to calligraphic art.

    Prior to a review on a work, the first consideration should be the

    subject who created the work; specifically, the work and its artistic

    value cannot be accurately evaluated without research the artist as

    the creator. Research on historical figures are questions about their

    social positions, artistic achievements, exchanges in cultural and

    artistic thoughts relevant to them, the awareness of their aesthetical

    thoughts, and beings that take recognizance of the objects.

    Moreover, the question about the being is to inquire about the

    artist’s personality that is directly linked to quality and creativity.

    Thus,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artistic positions of them who

    leaded art and culture in those days, as well as to the role models

    of talents inherent there. In this regard, a comprehensive

    investigation was made into personalia in ‘宣和書譜 (Xuan He Shu

    Pu)’.

    주제어: 선화서보, 6서의 분류, 인물유형, 심미창조, 인물론, 예술가상, 인재상關鍵詞: 宣和書譜, 6書的 分類, 人物類型, 審美創造, 人物論, 藝術家像, 人才像Keywords: Xuan He Shu Pu, Classification of the Six Books, Type of Character,

    Aesthetical Creation, Personalia, Role Model of an Artist, Role Model of a

    Talent

    (원고접수: 2013년 7월 8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8월 12일, 수정원고 접

    수: 8월 23일, 게재 확정: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