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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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1편: 모로코 ) <태양과 정열의 나라>로 잘 알려진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나라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스페인하면 내게는 다음과 같은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투우경기가 열리는 투우의 본고장,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태어나고 살던 나라, <무적함대>로 유명한 나라, 스페인 통일과 콜럼버스 신대륙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 이사벨 여왕의 나라,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과 더불어 세계를 탐험한 나라, 오랫동안 중남미 국가를 식민지 통치하였던 나라, 스 페인 내전을 다룬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의 무대가 된 나라, <게르니 카>, <아비뇽의 처녀들> 등으로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가 태어난 나라, 프랑코가 장기 집권한 나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가우디가 설계하고 짓기 시작하였다 는 성가족교회(Temple de la Sagrada Familia) 건축물이 있는 나라,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 명문 축구 구단이 겨루는 축구리그 <프리메리>가 있는 나라, 플라멩코와 집시여 인으로 유명한 나라 등등... 2016년 연말과 2017년 새해를 스페인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그동안 무척이나 가보고 싶던 스페인을 여행하기로 하였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져 여러 여 행사 중에서 처음 가보는 스페인을 전 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덤으로 <카 사블랑카>가 있는 모로코 및 포르투갈 도 여행에 포함되게 12일간의 여행 일정 이 비교적 잘 짜여 있고 가격도 합리적 으로 제시한 [하나 투어]의 패키지 상 품을 선택하였다. 참고로 이 상품은 그림에 나타낸 바와 같이 모로코의 <카 사블랑카>로 들어가 스페인의 <바르셀로 나>로 나오는 코스 로 직접 여행해 본 결과, 세 나라를 가 장 이상적으로 여행 할 수 있는 코스라고 여겨져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내 자신의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위해 스페인, 포르투갈 및 모로코를 여행하면 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출발하기 전 여행 가이드북과 함께 주로 인터넷을 통해 네이버 지식백과 및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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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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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1편 모로코 편)

lt태양과 정열의 나라gt로 잘 알려진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나라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스페인하면 내게는 다음과 같은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투우경기가 열리는

투우의 본고장 세르반테스의 lt돈키호테gt가 태어나고 살던 나라 lt무적함대gt로 유명한 나라

스페인 통일과 콜럼버스 신대륙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 이사벨 여왕의 나라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과 더불어 세계를 탐험한 나라 오랫동안 중남미 국가를 식민지 통치하였던 나라 스

페인 내전을 다룬 헤밍웨이의 lt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gt의 무대가 된 나라 lt게르니

카gt lt아비뇽의 처녀들gt 등으로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가 태어난 나라

프랑코가 장기 집권한 나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가우디가 설계하고 짓기 시작하였다

는 성가족교회(Temple de la Sagrada Familia) 건축물이 있는 나라 ltFC 바르셀로나gt lt레알

마드리드gt 등 명문 축구 구단이 겨루는 축구리그 lt프리메리gt가 있는 나라 플라멩코와 집시여

인으로 유명한 나라 등등

2016년 연말과 2017년 새해를 스페인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그동안 무척이나 가보고 싶던

스페인을 여행하기로 하였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져 여러 여

행사 중에서 처음

가보는 스페인을 전

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덤으로 lt카

사블랑카gt가 있는

모로코 및 포르투갈

도 여행에 포함되게

12일간의 여행 일정

이 비교적 잘 짜여

있고 가격도 합리적

으로 제시한 [하나

투어]의 패키지 상

품을 선택하였다

참고로 이 상품은

그림에 나타낸 바와

같이 모로코의 lt카

사블랑카gt로 들어가

스페인의 lt바르셀로

나gt로 나오는 코스

로 직접 여행해 본

결과 세 나라를 가

장 이상적으로 여행

할 수 있는 코스라고 여겨져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내 자신의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위해 스페인 포르투갈 및 모로코를 여행하면

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출발하기 전 여행 가이드북과 함께 주로 인터넷을 통해 네이버 지식백과 및 두산백과사전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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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ber amp EnCybercom)으로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및 모로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스

페인에 비해 포르투갈 정보가 적었고 모로코에 대한 정보는 수집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모로코 및 포르트갈이 스페인에 비해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 같아

여행기 제목을 lt2016 스페인 여행기gt에서 lt2016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gt로 의도적으

로 바꾸었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여행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여

행은 자신이 사전에 그곳에 대해 조사하여 알고 간만큼 더욱 잘 느낄 수 있으며 실제로 여행

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사전 지식의

습득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이번 여행에서도 확인되었다

12월 26일(월) 첫째 날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가다

(카타르 도하 - 모로코 카사블랑카)

크리스마스 날인 2016년 12월 25일 드디어 오늘부터 12일간 스페인을 비롯하여 모로코 및

포르투갈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야 출발이기 때문에 오전에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편하게 쉬다가 집 부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저녁 7시 반경 집을 나서 버스로 서울역까

지 가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지난 연말연시에 미얀마 여행과 7월 초 베

트남 하노이를 여행한 후 반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이지만 항상 공항으로 갈 때는 설렘이 앞

섰다 9시경에 공항에 도착하여 하나투어 카운터로 가서 이번 우리 여행을 인솔할 인솔자를

만나 항공표를 받았다 인솔자는 (이번에 함께 여행을 하는 고2인 민혁이가 너무 멋지다는 말

을 연거푸 할 정도로) 젊고 키가 큰 인상이 좋은 남성(이한림 과장)이었다 아세아나 마일리

지 카운터로 가서 지난번 여행 때 적립하지 못한 마일리지를 적립시킨 후 출국 수속을 하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가 면세점에서 간단히 쇼핑을 하며 보내다 날짜가 바뀌는 밤 12시쯤에 탑

승장으로 가서 탑승 수속을 하였다

12월 26일 0시 50분경 카타르 항공기(QR859편)는 예정대로 인천국제공항을 힘차게 출발하

였다 드디어 12일간의 스페인 모로코 및 포르투갈 여행이 시작되었다 항공기는 중국 산둥

반도 및 북경 상공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 비행하였다 문득 10여 년 전인 2006년 실크로드를

여행하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국 서쪽의 신강성의 우루무치를 시작으로 동쪽으로 투루판

둔황 가욕관 난주 천수를 거쳐 시안까지 10여 일간 강행군으로 여행하는 코스([2006 실크

로드 답사기] 참조)였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개발한 여행코스라서 교

통 숙박 및 식사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났다 아마 내가 탄 비행기는 현재 그 코스

를 반대로 하여 중국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다 인천공항을 이륙한지 6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항공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더니 파키스탄 영공으로 들어가 이란 영공 남쪽 해안을 따라 비

행하다가 페르시아 만(통칭 걸프 만)과 오만 만을 연결하는 lt호르무즈 해협gt을 건너기 시작하

였다 세계 정치 및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쳐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호르무즈 해협은 생각하였

던 것보다 매우 좁은 해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항공기는 UAE의 두바이 상공을 지나

면서 멋진 야경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특히 뉴스를 통해 알고 있던 바다를 매립하여 팜 데이

라(Palm Deira) 팜 제벨알리(Palm Jebel Ali) 팜 주매이라(Palm Jumeira)라는 3개의 인공

섬을 만들어 야자수 모양의 타운을 형성하고 그 위에 160층에 달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버즈

두바이 타워를 만든 새로운 개념의 인공 도시인 팜 아일랜드(Palm Island)를 항공기에서 내려

다보는 야경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다만 인공도시를 만드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기억나면서 문득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인천시가 떠올랐다 또한 UAE의 두

바이 상공을 통과한 후 항공기가 북상하면서 해안가에 형성된 도시들의 멋진 야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에 남았다 드디어 항공기는 예정시간보다 다소 빠른 현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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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 45분경 약 1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카타르의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항공기에서 내리며 카타르 항공은 좌석 및 식사 등의 서비스 면에서 대한항공보

다도 더 좋다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는 이 항공을 적극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카타르(Qatar)]의 정식명칭은 카타르국(State of Qatar)으로 남쪽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나머지는 페르시아 만으로 둘러싸여 있다 18세기에는 오늘날 바

레인의 토후 할리파가의 영토였으나 1868년 영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16년 특별조약

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71년 9월 1일 독립하였다 이슬람 왕족에 의해 통치되는 중

동국가로서 국토면적이 적고 인구도 80만 명인 작은 나라이지만 900조의 천연가스와 152

억 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부국이자 세계 최상위 권에 속하는 경제부국이다 국

명은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지도에 lt카타라gt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고 한다 또한 lt도하(Doha)gt는 카타르의 수도이며 페르시아 만에 면하는 상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지명은 도화(Dowha)에서 변했는데 lt큰 나무gt라는 뜻이며 2001년 11월 세계무역

기구(WTO) 제4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른바 도하라운드가 채택된 도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석유개발과 더불어 급속히 근대화된 도시로 진주채집middot어업middot금속세공업이 발달

하였다 또한 최근 새로운 항만설비와 국제공항의 확장도 이루어졌다

약 2시간의 체류였지만 카타르 도하공항은 자기부상 열차 등 시설 면에서는 인천공항과

유사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규

모가 컸으나 검사가 지나치

게 엄격하다는 것과 면세지

역 중앙에 곰 같지 않지만

귀여운() 커다란 곰돌이 동

상이 눈에 띄었다 연결편

항공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도하공항 대

합실을 둘러보며 인구 80만

의 나라에서 공항에서 일하

는 사람 수를 고려해 보니

카타르가 이 도하공항을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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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브로 적극 활용하여 향후 고갈되는 자원부국에서 벗어나 자국의 새로운 경제 활력을 모색

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청년실업 문제에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리더십 부재를 생각하며 다소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카타르 항공기(QR1395편)에 탑승하였으나 정작 항공기가 이륙한

것은 8시경이었다 도하 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통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 다 본 사우디아라비아 국토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 사구로 뒤 덮인 고원의 사막지대였는데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인 아카바 만 근처에서 급격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카바 만은 1967년 6월 제3차 중

동전쟁의 한 요인이 된 곳으로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매우 좁은 해협으로 수심이 깊은지 바

닷물 빛깔이 너무나도 파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항공기가 시나이 반도로 들어서자 사우

디아라비아 국토보다는 다소 양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막지형

이 나타나고 있었다 간혹 나타나는 촌락은 아마 유목생활을 하는 베드인족들이 사는 촌락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척박한 토양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고달픈 삶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 다소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lt십계gt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즉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도착한 지역으로 유대인들이 수세기간 지금의 이

스라엘 땅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며 생활하였던 지역이 바로 이 시나이 반도였다 곧이어 사막

넘어 서쪽으로 홍해가 나타나고 시나이 반도 건너편으로 이집트 영토가 나타나면서 7년 전

이집트를 여행[lt2009 이집트 여행기gt 참조]할 때 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보았던 그 당시의 기

억과 함께 입체적으로 시나이반도와 아프리카를 가르고 있는 홍해의 모습이 그려졌다 홍해를

지나 이집트 영공으로 들어선 항공기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눈 아래로

나일 강가에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무척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지상에서 볼 때는 거대하게 보이던 피라미드가 10 km 상공에서 보니 손 안에 쥘 정도의 모형

과 같이 조그맣게 느껴져 신기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내가 여행하고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2010년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이집트 여행 시 카이로

의 박물관에서 감상하였던 유명한 lt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gt가 도난당했다는 소식 등과 함께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이로를 통과한 항공기가 나일 강의

델타지역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한 후 지중해로 나가 비행하기 시작하기에 잠시 눈

을 붙여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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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를 떠난 지 약 5시간 지나자 지중해 상공을 날던 항공기가 튀니지 상공을 통과하면서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계속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북부 아프리

카 해안지방의 자연풍경은 내가 예상하였던 것과는 달리 미국 중부나 대관령과 같이 드넓은

고원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느낌은 달랐다 즉 미국 중부는 지평선까지 평평한 초지

이고 대관령은 구릉이 심하고 초록으로 덮인 평원인데 비해 이곳 평원은 완만한 구릉과 함

께 초록이 무성하지 않은 평온한() 평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모로코로 들어서자 저 푸른 초

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초원 지대가 나타났으며 저 멀리 설산도

눈에 띄었다

참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이집트를 여행한 것 밖에 없고 모로코라

는 나라에 관해서는 lt카사블랑카gt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번 모로코를 여행

하면서 모로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 모로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래 내용은 여행을 다녀 온 후 정리한 모로코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 지리 및 기후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으로 편의상 여기에 소개한다

[모로코 일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lt모로코gt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으로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

로서 사용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

중해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으로 알제리와 접경하며 남서단

은 서사하라 및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속령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는 모로코는 유럽색이 짙은 국가이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

를 제외하면 446550로 남한의 약 7배에 해당한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인 65 베르베르인 34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

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3300만 명이며 주요 도시인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

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명 탕헤르

(Taacutenger) 70만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명이 살고 있다

모로코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나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아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의회는 상middot하 양원제이다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며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하고 있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

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

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모로코 지리 및 기후]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도~36도 서경 13도~17도에 놓여 있다 기후는 지역별

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아래 놓인다 지정

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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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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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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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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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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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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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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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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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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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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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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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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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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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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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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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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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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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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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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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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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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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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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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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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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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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ber amp EnCybercom)으로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및 모로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스

페인에 비해 포르투갈 정보가 적었고 모로코에 대한 정보는 수집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모로코 및 포르트갈이 스페인에 비해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 같아

여행기 제목을 lt2016 스페인 여행기gt에서 lt2016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gt로 의도적으

로 바꾸었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여행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여

행은 자신이 사전에 그곳에 대해 조사하여 알고 간만큼 더욱 잘 느낄 수 있으며 실제로 여행

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사전 지식의

습득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이번 여행에서도 확인되었다

12월 26일(월) 첫째 날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가다

(카타르 도하 - 모로코 카사블랑카)

크리스마스 날인 2016년 12월 25일 드디어 오늘부터 12일간 스페인을 비롯하여 모로코 및

포르투갈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야 출발이기 때문에 오전에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편하게 쉬다가 집 부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저녁 7시 반경 집을 나서 버스로 서울역까

지 가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지난 연말연시에 미얀마 여행과 7월 초 베

트남 하노이를 여행한 후 반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이지만 항상 공항으로 갈 때는 설렘이 앞

섰다 9시경에 공항에 도착하여 하나투어 카운터로 가서 이번 우리 여행을 인솔할 인솔자를

만나 항공표를 받았다 인솔자는 (이번에 함께 여행을 하는 고2인 민혁이가 너무 멋지다는 말

을 연거푸 할 정도로) 젊고 키가 큰 인상이 좋은 남성(이한림 과장)이었다 아세아나 마일리

지 카운터로 가서 지난번 여행 때 적립하지 못한 마일리지를 적립시킨 후 출국 수속을 하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가 면세점에서 간단히 쇼핑을 하며 보내다 날짜가 바뀌는 밤 12시쯤에 탑

승장으로 가서 탑승 수속을 하였다

12월 26일 0시 50분경 카타르 항공기(QR859편)는 예정대로 인천국제공항을 힘차게 출발하

였다 드디어 12일간의 스페인 모로코 및 포르투갈 여행이 시작되었다 항공기는 중국 산둥

반도 및 북경 상공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 비행하였다 문득 10여 년 전인 2006년 실크로드를

여행하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국 서쪽의 신강성의 우루무치를 시작으로 동쪽으로 투루판

둔황 가욕관 난주 천수를 거쳐 시안까지 10여 일간 강행군으로 여행하는 코스([2006 실크

로드 답사기] 참조)였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개발한 여행코스라서 교

통 숙박 및 식사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났다 아마 내가 탄 비행기는 현재 그 코스

를 반대로 하여 중국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다 인천공항을 이륙한지 6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항공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더니 파키스탄 영공으로 들어가 이란 영공 남쪽 해안을 따라 비

행하다가 페르시아 만(통칭 걸프 만)과 오만 만을 연결하는 lt호르무즈 해협gt을 건너기 시작하

였다 세계 정치 및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쳐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호르무즈 해협은 생각하였

던 것보다 매우 좁은 해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항공기는 UAE의 두바이 상공을 지나

면서 멋진 야경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특히 뉴스를 통해 알고 있던 바다를 매립하여 팜 데이

라(Palm Deira) 팜 제벨알리(Palm Jebel Ali) 팜 주매이라(Palm Jumeira)라는 3개의 인공

섬을 만들어 야자수 모양의 타운을 형성하고 그 위에 160층에 달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버즈

두바이 타워를 만든 새로운 개념의 인공 도시인 팜 아일랜드(Palm Island)를 항공기에서 내려

다보는 야경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다만 인공도시를 만드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기억나면서 문득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인천시가 떠올랐다 또한 UAE의 두

바이 상공을 통과한 후 항공기가 북상하면서 해안가에 형성된 도시들의 멋진 야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에 남았다 드디어 항공기는 예정시간보다 다소 빠른 현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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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 45분경 약 1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카타르의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항공기에서 내리며 카타르 항공은 좌석 및 식사 등의 서비스 면에서 대한항공보

다도 더 좋다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는 이 항공을 적극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카타르(Qatar)]의 정식명칭은 카타르국(State of Qatar)으로 남쪽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나머지는 페르시아 만으로 둘러싸여 있다 18세기에는 오늘날 바

레인의 토후 할리파가의 영토였으나 1868년 영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16년 특별조약

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71년 9월 1일 독립하였다 이슬람 왕족에 의해 통치되는 중

동국가로서 국토면적이 적고 인구도 80만 명인 작은 나라이지만 900조의 천연가스와 152

억 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부국이자 세계 최상위 권에 속하는 경제부국이다 국

명은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지도에 lt카타라gt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고 한다 또한 lt도하(Doha)gt는 카타르의 수도이며 페르시아 만에 면하는 상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지명은 도화(Dowha)에서 변했는데 lt큰 나무gt라는 뜻이며 2001년 11월 세계무역

기구(WTO) 제4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른바 도하라운드가 채택된 도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석유개발과 더불어 급속히 근대화된 도시로 진주채집middot어업middot금속세공업이 발달

하였다 또한 최근 새로운 항만설비와 국제공항의 확장도 이루어졌다

약 2시간의 체류였지만 카타르 도하공항은 자기부상 열차 등 시설 면에서는 인천공항과

유사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규

모가 컸으나 검사가 지나치

게 엄격하다는 것과 면세지

역 중앙에 곰 같지 않지만

귀여운() 커다란 곰돌이 동

상이 눈에 띄었다 연결편

항공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도하공항 대

합실을 둘러보며 인구 80만

의 나라에서 공항에서 일하

는 사람 수를 고려해 보니

카타르가 이 도하공항을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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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브로 적극 활용하여 향후 고갈되는 자원부국에서 벗어나 자국의 새로운 경제 활력을 모색

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청년실업 문제에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리더십 부재를 생각하며 다소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카타르 항공기(QR1395편)에 탑승하였으나 정작 항공기가 이륙한

것은 8시경이었다 도하 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통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 다 본 사우디아라비아 국토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 사구로 뒤 덮인 고원의 사막지대였는데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인 아카바 만 근처에서 급격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카바 만은 1967년 6월 제3차 중

동전쟁의 한 요인이 된 곳으로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매우 좁은 해협으로 수심이 깊은지 바

닷물 빛깔이 너무나도 파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항공기가 시나이 반도로 들어서자 사우

디아라비아 국토보다는 다소 양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막지형

이 나타나고 있었다 간혹 나타나는 촌락은 아마 유목생활을 하는 베드인족들이 사는 촌락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척박한 토양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고달픈 삶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 다소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lt십계gt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즉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도착한 지역으로 유대인들이 수세기간 지금의 이

스라엘 땅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며 생활하였던 지역이 바로 이 시나이 반도였다 곧이어 사막

넘어 서쪽으로 홍해가 나타나고 시나이 반도 건너편으로 이집트 영토가 나타나면서 7년 전

이집트를 여행[lt2009 이집트 여행기gt 참조]할 때 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보았던 그 당시의 기

억과 함께 입체적으로 시나이반도와 아프리카를 가르고 있는 홍해의 모습이 그려졌다 홍해를

지나 이집트 영공으로 들어선 항공기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눈 아래로

나일 강가에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무척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지상에서 볼 때는 거대하게 보이던 피라미드가 10 km 상공에서 보니 손 안에 쥘 정도의 모형

과 같이 조그맣게 느껴져 신기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내가 여행하고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2010년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이집트 여행 시 카이로

의 박물관에서 감상하였던 유명한 lt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gt가 도난당했다는 소식 등과 함께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이로를 통과한 항공기가 나일 강의

델타지역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한 후 지중해로 나가 비행하기 시작하기에 잠시 눈

을 붙여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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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를 떠난 지 약 5시간 지나자 지중해 상공을 날던 항공기가 튀니지 상공을 통과하면서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계속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북부 아프리

카 해안지방의 자연풍경은 내가 예상하였던 것과는 달리 미국 중부나 대관령과 같이 드넓은

고원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느낌은 달랐다 즉 미국 중부는 지평선까지 평평한 초지

이고 대관령은 구릉이 심하고 초록으로 덮인 평원인데 비해 이곳 평원은 완만한 구릉과 함

께 초록이 무성하지 않은 평온한() 평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모로코로 들어서자 저 푸른 초

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초원 지대가 나타났으며 저 멀리 설산도

눈에 띄었다

참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이집트를 여행한 것 밖에 없고 모로코라

는 나라에 관해서는 lt카사블랑카gt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번 모로코를 여행

하면서 모로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 모로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래 내용은 여행을 다녀 온 후 정리한 모로코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 지리 및 기후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으로 편의상 여기에 소개한다

[모로코 일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lt모로코gt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으로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

로서 사용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

중해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으로 알제리와 접경하며 남서단

은 서사하라 및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속령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는 모로코는 유럽색이 짙은 국가이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

를 제외하면 446550로 남한의 약 7배에 해당한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인 65 베르베르인 34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

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3300만 명이며 주요 도시인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

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명 탕헤르

(Taacutenger) 70만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명이 살고 있다

모로코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나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아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의회는 상middot하 양원제이다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며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하고 있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

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

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모로코 지리 및 기후]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도~36도 서경 13도~17도에 놓여 있다 기후는 지역별

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아래 놓인다 지정

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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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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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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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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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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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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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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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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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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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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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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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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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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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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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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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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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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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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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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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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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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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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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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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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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3: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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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 45분경 약 1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카타르의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항공기에서 내리며 카타르 항공은 좌석 및 식사 등의 서비스 면에서 대한항공보

다도 더 좋다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는 이 항공을 적극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카타르(Qatar)]의 정식명칭은 카타르국(State of Qatar)으로 남쪽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나머지는 페르시아 만으로 둘러싸여 있다 18세기에는 오늘날 바

레인의 토후 할리파가의 영토였으나 1868년 영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16년 특별조약

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71년 9월 1일 독립하였다 이슬람 왕족에 의해 통치되는 중

동국가로서 국토면적이 적고 인구도 80만 명인 작은 나라이지만 900조의 천연가스와 152

억 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부국이자 세계 최상위 권에 속하는 경제부국이다 국

명은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지도에 lt카타라gt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고 한다 또한 lt도하(Doha)gt는 카타르의 수도이며 페르시아 만에 면하는 상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지명은 도화(Dowha)에서 변했는데 lt큰 나무gt라는 뜻이며 2001년 11월 세계무역

기구(WTO) 제4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른바 도하라운드가 채택된 도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석유개발과 더불어 급속히 근대화된 도시로 진주채집middot어업middot금속세공업이 발달

하였다 또한 최근 새로운 항만설비와 국제공항의 확장도 이루어졌다

약 2시간의 체류였지만 카타르 도하공항은 자기부상 열차 등 시설 면에서는 인천공항과

유사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규

모가 컸으나 검사가 지나치

게 엄격하다는 것과 면세지

역 중앙에 곰 같지 않지만

귀여운() 커다란 곰돌이 동

상이 눈에 띄었다 연결편

항공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도하공항 대

합실을 둘러보며 인구 80만

의 나라에서 공항에서 일하

는 사람 수를 고려해 보니

카타르가 이 도하공항을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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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브로 적극 활용하여 향후 고갈되는 자원부국에서 벗어나 자국의 새로운 경제 활력을 모색

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청년실업 문제에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리더십 부재를 생각하며 다소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카타르 항공기(QR1395편)에 탑승하였으나 정작 항공기가 이륙한

것은 8시경이었다 도하 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통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 다 본 사우디아라비아 국토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 사구로 뒤 덮인 고원의 사막지대였는데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인 아카바 만 근처에서 급격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카바 만은 1967년 6월 제3차 중

동전쟁의 한 요인이 된 곳으로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매우 좁은 해협으로 수심이 깊은지 바

닷물 빛깔이 너무나도 파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항공기가 시나이 반도로 들어서자 사우

디아라비아 국토보다는 다소 양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막지형

이 나타나고 있었다 간혹 나타나는 촌락은 아마 유목생활을 하는 베드인족들이 사는 촌락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척박한 토양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고달픈 삶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 다소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lt십계gt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즉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도착한 지역으로 유대인들이 수세기간 지금의 이

스라엘 땅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며 생활하였던 지역이 바로 이 시나이 반도였다 곧이어 사막

넘어 서쪽으로 홍해가 나타나고 시나이 반도 건너편으로 이집트 영토가 나타나면서 7년 전

이집트를 여행[lt2009 이집트 여행기gt 참조]할 때 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보았던 그 당시의 기

억과 함께 입체적으로 시나이반도와 아프리카를 가르고 있는 홍해의 모습이 그려졌다 홍해를

지나 이집트 영공으로 들어선 항공기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눈 아래로

나일 강가에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무척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지상에서 볼 때는 거대하게 보이던 피라미드가 10 km 상공에서 보니 손 안에 쥘 정도의 모형

과 같이 조그맣게 느껴져 신기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내가 여행하고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2010년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이집트 여행 시 카이로

의 박물관에서 감상하였던 유명한 lt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gt가 도난당했다는 소식 등과 함께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이로를 통과한 항공기가 나일 강의

델타지역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한 후 지중해로 나가 비행하기 시작하기에 잠시 눈

을 붙여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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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를 떠난 지 약 5시간 지나자 지중해 상공을 날던 항공기가 튀니지 상공을 통과하면서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계속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북부 아프리

카 해안지방의 자연풍경은 내가 예상하였던 것과는 달리 미국 중부나 대관령과 같이 드넓은

고원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느낌은 달랐다 즉 미국 중부는 지평선까지 평평한 초지

이고 대관령은 구릉이 심하고 초록으로 덮인 평원인데 비해 이곳 평원은 완만한 구릉과 함

께 초록이 무성하지 않은 평온한() 평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모로코로 들어서자 저 푸른 초

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초원 지대가 나타났으며 저 멀리 설산도

눈에 띄었다

참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이집트를 여행한 것 밖에 없고 모로코라

는 나라에 관해서는 lt카사블랑카gt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번 모로코를 여행

하면서 모로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 모로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래 내용은 여행을 다녀 온 후 정리한 모로코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 지리 및 기후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으로 편의상 여기에 소개한다

[모로코 일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lt모로코gt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으로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

로서 사용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

중해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으로 알제리와 접경하며 남서단

은 서사하라 및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속령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는 모로코는 유럽색이 짙은 국가이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

를 제외하면 446550로 남한의 약 7배에 해당한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인 65 베르베르인 34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

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3300만 명이며 주요 도시인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

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명 탕헤르

(Taacutenger) 70만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명이 살고 있다

모로코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나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아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의회는 상middot하 양원제이다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며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하고 있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

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

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모로코 지리 및 기후]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도~36도 서경 13도~17도에 놓여 있다 기후는 지역별

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아래 놓인다 지정

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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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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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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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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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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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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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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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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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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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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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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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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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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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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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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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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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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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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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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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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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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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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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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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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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4: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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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브로 적극 활용하여 향후 고갈되는 자원부국에서 벗어나 자국의 새로운 경제 활력을 모색

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청년실업 문제에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리더십 부재를 생각하며 다소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카타르 항공기(QR1395편)에 탑승하였으나 정작 항공기가 이륙한

것은 8시경이었다 도하 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통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 다 본 사우디아라비아 국토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 사구로 뒤 덮인 고원의 사막지대였는데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인 아카바 만 근처에서 급격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카바 만은 1967년 6월 제3차 중

동전쟁의 한 요인이 된 곳으로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매우 좁은 해협으로 수심이 깊은지 바

닷물 빛깔이 너무나도 파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항공기가 시나이 반도로 들어서자 사우

디아라비아 국토보다는 다소 양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막지형

이 나타나고 있었다 간혹 나타나는 촌락은 아마 유목생활을 하는 베드인족들이 사는 촌락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척박한 토양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고달픈 삶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 다소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lt십계gt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즉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도착한 지역으로 유대인들이 수세기간 지금의 이

스라엘 땅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며 생활하였던 지역이 바로 이 시나이 반도였다 곧이어 사막

넘어 서쪽으로 홍해가 나타나고 시나이 반도 건너편으로 이집트 영토가 나타나면서 7년 전

이집트를 여행[lt2009 이집트 여행기gt 참조]할 때 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보았던 그 당시의 기

억과 함께 입체적으로 시나이반도와 아프리카를 가르고 있는 홍해의 모습이 그려졌다 홍해를

지나 이집트 영공으로 들어선 항공기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눈 아래로

나일 강가에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무척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지상에서 볼 때는 거대하게 보이던 피라미드가 10 km 상공에서 보니 손 안에 쥘 정도의 모형

과 같이 조그맣게 느껴져 신기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내가 여행하고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2010년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이집트 여행 시 카이로

의 박물관에서 감상하였던 유명한 lt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gt가 도난당했다는 소식 등과 함께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이로를 통과한 항공기가 나일 강의

델타지역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한 후 지중해로 나가 비행하기 시작하기에 잠시 눈

을 붙여 잠을 청하였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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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를 떠난 지 약 5시간 지나자 지중해 상공을 날던 항공기가 튀니지 상공을 통과하면서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계속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북부 아프리

카 해안지방의 자연풍경은 내가 예상하였던 것과는 달리 미국 중부나 대관령과 같이 드넓은

고원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느낌은 달랐다 즉 미국 중부는 지평선까지 평평한 초지

이고 대관령은 구릉이 심하고 초록으로 덮인 평원인데 비해 이곳 평원은 완만한 구릉과 함

께 초록이 무성하지 않은 평온한() 평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모로코로 들어서자 저 푸른 초

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초원 지대가 나타났으며 저 멀리 설산도

눈에 띄었다

참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이집트를 여행한 것 밖에 없고 모로코라

는 나라에 관해서는 lt카사블랑카gt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번 모로코를 여행

하면서 모로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 모로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래 내용은 여행을 다녀 온 후 정리한 모로코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 지리 및 기후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으로 편의상 여기에 소개한다

[모로코 일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lt모로코gt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으로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

로서 사용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

중해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으로 알제리와 접경하며 남서단

은 서사하라 및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속령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는 모로코는 유럽색이 짙은 국가이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

를 제외하면 446550로 남한의 약 7배에 해당한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인 65 베르베르인 34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

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3300만 명이며 주요 도시인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

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명 탕헤르

(Taacutenger) 70만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명이 살고 있다

모로코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나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아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의회는 상middot하 양원제이다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며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하고 있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

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

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모로코 지리 및 기후]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도~36도 서경 13도~17도에 놓여 있다 기후는 지역별

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아래 놓인다 지정

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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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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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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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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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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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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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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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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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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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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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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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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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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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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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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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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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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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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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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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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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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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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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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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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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5: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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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를 떠난 지 약 5시간 지나자 지중해 상공을 날던 항공기가 튀니지 상공을 통과하면서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계속 서쪽으로 날아갔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북부 아프리

카 해안지방의 자연풍경은 내가 예상하였던 것과는 달리 미국 중부나 대관령과 같이 드넓은

고원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느낌은 달랐다 즉 미국 중부는 지평선까지 평평한 초지

이고 대관령은 구릉이 심하고 초록으로 덮인 평원인데 비해 이곳 평원은 완만한 구릉과 함

께 초록이 무성하지 않은 평온한() 평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모로코로 들어서자 저 푸른 초

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초원 지대가 나타났으며 저 멀리 설산도

눈에 띄었다

참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이집트를 여행한 것 밖에 없고 모로코라

는 나라에 관해서는 lt카사블랑카gt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번 모로코를 여행

하면서 모로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 모로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래 내용은 여행을 다녀 온 후 정리한 모로코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 지리 및 기후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으로 편의상 여기에 소개한다

[모로코 일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lt모로코gt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으로 수도는

라바트(Rabat)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고 프랑스어가 상용어이자 제1 외국어

로서 사용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

중해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으로 알제리와 접경하며 남서단

은 서사하라 및 모리타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속령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는 모로코는 유럽색이 짙은 국가이다 면적은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 지역의 252120

를 제외하면 446550로 남한의 약 7배에 해당한다

모로코 국민은 아랍인 65 베르베르인 341 유럽인과 흑인 등 07 유대인 02로 구

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3300만 명이며 주요 도시인 카사블랑카(Casablanca) 390만 명 라

바트살레(RabatSale) 155만 명 페스(Fes) 104만 명 마라케시(Marrakech) 90만 명 탕헤르

(Taacutenger) 70만 명 케니트라(Kenitra) 57만 명이 살고 있다

모로코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이나 알라(Allah) 조국 국왕을 국시로 삼아 국왕은 3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의회는 상middot하 양원제이다 현재 국가원수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VI) 국왕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인구의 987 기독교가 11 유대교가 02이며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국왕이 종교 수반을 겸하고 있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나 모로코인에 대

해서는 이슬람교 외의 종교 포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주요 자원은 세계 제3위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인광석과 철 망간 구리 등이다 화

폐단위는 디람(DirhamDH - 국제통화 표기로는 MAD로 표시 모로코 디람)이다

[모로코 지리 및 기후]

경위도상으로는 전 국토가 북위 23도~36도 서경 13도~17도에 놓여 있다 기후는 지역별

로 차이가 있어 북부는 지중해성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아래 놓인다 지정

학적으로 북동쪽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남서쪽의 대서양 연안에까지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는 사하라사막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Rif) 산맥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아틀라스(Atlas) 산맥에는 높이 4165m의 투브칼 산(Je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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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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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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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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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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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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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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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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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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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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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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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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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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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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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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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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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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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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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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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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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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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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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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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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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6: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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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bkal) 등 4000m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모로코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내륙 지방

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 들

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acutenger) 라바트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

이 탕헤르 라바트 등의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서기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와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으나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와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 등 모로

코 북부지역을 점령하였으나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옴미아

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711

년경에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

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로 787년 이슬람교가 수

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다 이드리스 왕조는 모로코

내 아랍 왕조 수립의 기틀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

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베

르베르족이 모로코의 두 번째 왕조인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년~1145년)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가톨릭인들에게 빼앗겼던 발렌시아

(Valencia) 등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

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참고로 모라비드 제국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

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

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세 번째 왕조는 모하드(Al Mohads) 왕조(1145년~1248년)로 아틀라스(Atlas)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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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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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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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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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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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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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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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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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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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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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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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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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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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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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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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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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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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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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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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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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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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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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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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7: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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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왕조이

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가톨릭 세력에게 잃었다 모하드 왕조 쇠

퇴에 따른 혼란기에 메레니드(Merenids) 왕조와 와타시드(Wattasids) 왕조(1248년~1554년)가

나타났다 먼저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 족이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를 수립하였고 1465년 와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와타

시드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

한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 아가디르

(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인 사아드(Saadians) 왕

조(1554년~1665년)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

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

하여 왕국은 마라케시 메크네스(Meknes) 라바트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Alaouite) 왕조(1665년~1912년)는 사아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

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ed 재위 1757

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

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또한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

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

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

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acute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

(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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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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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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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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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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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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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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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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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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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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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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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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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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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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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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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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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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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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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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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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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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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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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8: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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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lt국제 행정부gt(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고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

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스페인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모로코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 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

을 확보하였다 결국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1912

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유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와 페스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가톨릭을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

다 1927년 즉위한 모하메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

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모하메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

였고 결국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

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중심

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권력은 계속 유

지하였다 특히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결국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 폴리사리오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

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

월 모로코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middot하 양원을 구성

하였다 1999년 7월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로코와 스페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모로코의 제2위 교역 대상국으로서 2009년 모로코 전체 수출액의 212 수입

액의 128를 점유하였고 그 비중이 점차 증가 추세에 있으며 1995년~2008년 양국 교역 규

모는 6배 이상 성장하였다 특히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스페인 투자의 75 수출액의

36를 점유하고 있다

양국 관계는 모로코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의 어업협정 갱신협상 서사하라

문제 모로코를 경유하는 스페인 밀입국자 및 불법 이민자 문제 모로코 연안의 스페인령 도서

문제 등으로 잠시 소원해졌으나 2010년 8월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Ⅰ) 스페인 국왕이 전화통화를 하고 8월 23일에는 스페인 내무장관이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는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 지중해 연안의 세우타(Ceuta)와 멜릴라

(Mellila) 두 도시에 대한 영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페인 측에 이들 지역의 법적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4년 3월

스페인에 사회당 정부가 출현한 이후 양국 관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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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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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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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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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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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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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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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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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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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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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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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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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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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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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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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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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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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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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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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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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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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9: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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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고 자국 상품의 알제리 시장 진출을 위해 서사하라

문제와 관련된 공식 입장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모로코와 스페인은 양국 간에 정치적 이견이

있음에도 경제적 실익을 꾀하고 있다 일예로 1979년 합의한 지브롤터 해역을 연결하는 해저

300m 길이의 3차선 터널 건설(약 150억 달러)에 대해 공개 입찰하는 등 향후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내가 탄 항공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을 다소 늦게 이륙하였지만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

시간인 현지시각 12시 40분에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lt모하메드 5세gt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

였다 장장 17시간의 비행시간과 2시간의 연결편 기다림을 합치면 무려 19시간 걸려 아시아

중동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9시간의 시차 및 피로가 별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이 뜻밖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며 도리어 모로코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설

렘이 앞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손꼽히는 나름대로 규모를 가진 공항이라는 카사블랑카 국

제공항은 실제로는 우리나라 지방 국제공항보다도 시설 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

안에서 소르띠에(Sortie 출구)라는 프랑스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표기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

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분할 점령을 받은 역사로 인해 프랑스

어가 제2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현지 모로코 가이드(모로코

에 살고 있는 한국인 남성)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짐을 버스에 싣기 위해 가서 보니 대형 버

스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여행이 비교적 편안할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이

번 여행 전체에 걸쳐 들어맞았다

공항서 카사블랑카 시내까지는 버스로 30~40분 걸린다고 하는데 가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

니 드넓은 밀밭과 목초지로 군데군데 농가 및 당나귀 양 젖소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주

민들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닌 가무잡잡하고 동양인 같은 아랍계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한바 모로코 국민의 99가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외국인은 구별이 거의 안 된다고 함)

이고 흑인이나 백인은 1도 안 된다니 이것은 모로코에 관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 원인을

따지고 보니 아마도 카사블랑카가 내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1942년 개봉하였다

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

토리가 강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또한 두 백인 연인으로 인해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아프리카 대륙

의 일부이고 유럽과도 인접해 있지만 인종이나 언어 종교로 보면 중동에 가깝다는 것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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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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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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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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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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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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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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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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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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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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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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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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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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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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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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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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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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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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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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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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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0: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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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카사블랑카라는 뜻은 카사(Casa)는lsquo집rsquo이

고 블랑카(Blanca)는lsquo하얀색rsquo이라는 말이므로 직역한다면 lt하얀 집gt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랍어로는 lt다르엘베이다gt(Dar el-Beida)라고 한다 원래 카사블랑카는 15세기 초반까지 인

구 천 명 정도의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던 어촌으로 lt안파gt라고 불렸으나 15세기 중반 포르

투갈의 침공을 받은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밀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또한 1907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1912년 이후 료티 원수의 통치하에서 근대

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어 현재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

로 변모하였다 즉 모로코 공업생산의 90가 이 도시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lt라바

트gt로 통하는 도로 연변의 동부와 북동부는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모로코 수출입 무

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북쪽에 수도 lt라

바트gt가 있지만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 몰려있는 행정 중심인 카사블랑카야말로 모로코를 대표

하는 관광도시이자 경제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야자수(성경에 나오는 lt종려나무gt로 lsquo대추야자rsquo라고도 함)가 늘어선 시가지를 달

리다 외곽지역 프랑스인들이 거주하던 낮은 산비탈 지역을 통과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프랑

스 영향으로 3~5 층의 주상복합 소형아파트가 즐비하였는데 대부분의 건물들이 카사블랑카

(하얀 집)라는 이름처럼 흰빛을 띄고 있었다 곧 눈앞에 바닷가가 나타나며 끝없는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lt늑대 무리gt라는 뜻의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이었다

lt마인 디악gt 해안의 lt꼬흐니슈 거리gt

해안은 서핑하기 좋게 파도가 크며 맥도널드 같은 서양식 체인점을 포함해 분위기 좋은

고급 음식점들이 해안가에 즐비하고 현지인들 옷차림도 무척 세련된 점 등 한 눈으로 봐도

이 지역이 카사블랑카 부유층들이 오는 고급 해변 휴양지로 대서양 너머로 지는 석양이 환상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고 그 보다 멀리 카사블랑카의 상징이 된 lt하산 2세 사원gt의 높은 탑

이 눈에 띄었다 코란의 lsquo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해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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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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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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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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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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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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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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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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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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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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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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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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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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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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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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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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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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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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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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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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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보니 하산 2세 사원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겠다는 말이 다소 실감났다 그런데 이곳에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화장실을 사

용하기 위해 들어간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로 한국의 16도 안 되

는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현 모

나코 왕인 lt모하메드 6세gt 및 그의 가족사진이 해변에 세워져 있는 대형광고판에 그려져 있다

는 사실로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에게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올라 카사블랑카 제1의 관광명소인 lt하산 2세 사원(하산 모스크)gt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슬램(빈민)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우중충한 건물 앞 탁자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한

가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 아까 햄버거 가격이 떠오르며 이 나라도 빈부차

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을 막아 간척지 위에 지어졌

다는 하산 2세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광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하산 2세 사원은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lt알-하람 모스크

(al-Haram Mosque)gt와 메디나의

lt예언자 모스크(Prophets

Mosque)gt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모스크 건설에 투입된 장인만도 1만

여 명 공사 기간은 8년이나 소요되

어 1993년에 완공된 거대한 건축물

이다 실제로 하산 2세 사원은 실내

외에 각각 2만 명과 8만 명 합쳐

서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매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대규모 사원으로 특히 높이

가 200m나 되는 거대한 기둥사원이

우뚝 솟아있어 어디를 가든 눈에 띈

다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는 특이하

게도 대리석이 깔려 있어 얼핏 보면 사원이라기보다 고급스런 궁전 같으며 기둥과 건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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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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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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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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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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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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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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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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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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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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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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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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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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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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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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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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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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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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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2: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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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실내 곳곳은 모로코 전통 문양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961년 즉위하여 1999년 서거한 현 모하메드 6세 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코란의 lsquo신의 옥좌

는 물 위에 지어졌다rsquo는 구절에 따라 해안가 절벽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바로 대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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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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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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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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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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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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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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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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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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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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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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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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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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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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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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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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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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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3: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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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원한 바람과 석양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특히 태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지며 내뿜는 빛

깔에 마치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모스크 벽면 주위로 반

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아

직 해가 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건물지붕이 우리나라 청와대와

비슷하게 청기와 지붕이라는 점이 무척 낯설었는데 나

중에 보니 모로코에서는 모스크 및 왕궁 지붕이 대부분

청기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국민의 헌금

(강제 징수가 맞을 듯싶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니 철골

시멘트 구조에 겉에 대리석 및 모자이크 장식을 붙인

조악한 건축물이고 해안에 접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필

연적으로 따라오는 소금기에 따른 부식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모로

코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지 한편

으로는 궁금하였지만 사원 옆으로 난 해안 방파제에

시민들이 나와 낚시 등을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지며 이런 광장을 국민

들에게 제공한 면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상징으로서 나

와 같은 관광객을 끌 수 있어 관광 산업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원은 하산 2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하산 2세 사원 입구에 서서 이 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영화 lt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편gt에서 톰크루즈가 비행기에

서 떨어져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때 이 도시의 상징인 lt하산 2세 사원gt의 탑이 보였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오토바이 추격 장면 등 그 영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반가웠다

다시 버스에 올라 프랑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시가지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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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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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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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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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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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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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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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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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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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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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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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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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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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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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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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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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4: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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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풍이 가미된 lsquo모레스크rsquo(mauresque무어식) 건축물과 함께 당시 모로코 전통 스타일

이 살아있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30년대의 건축물이 재건축되거나 보존

된 것이라는데 모로코의 섬세한 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

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여 아름답다는 느

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이 건물들은 은행이나 관공서 우

체국 호텔 극장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버

스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며 현지인들의 휴식처인 lt모하

메드 5세 광장gt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모로코 시민들과 비둘기 떼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는 3년 전 건설되었다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

다 또한 길 건너에는 시 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

역이 카사블랑카의 중심지역임을 입증하듯 시 청사가 중

심점이 되어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져 있었다 또

한 시내 중심가답게 광장 중심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

이 아프리카 도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카사블랑카에서가 아

니더라도 모하메드 5세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많은 모로코인 들에게 국부로

숭상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하메드 5세는 현 모

하메드 6세의 할아버지로 1912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마침내 1956년 독립을 쟁취하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를

건설하다 196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카사블랑카 말고도 수도인 라바트에 모하메드 5세 거리

나 lt모하메드 5세 묘gt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우리 일행은 카사블랑카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중심가에 위치한

Washington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였다 호텔 이름이 거창하고 시설 및 규모로 보면 예

전에는 일류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오래되어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생선튀

김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모로코는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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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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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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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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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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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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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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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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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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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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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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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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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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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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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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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5: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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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로코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 색다른 느낌은 들었다

방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모하메드 5세 광장 쪽을 향해 거닐며 카사블랑카 도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눈에 띈 것이

신문 가판대로 우리나라도 80~90년대에는 거리에 신문 가판대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

운 느낌이 들었다 큰길가인 모하메드 5세 광장 앞으로 와서 호텔 1층에 카사블랑카가 영화

속 주요 촬영장소인 lt릭스 카페 아메리칸gt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하얏트 호텔을 가 볼 까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이미 카사블랑카는 영화가 만들어진 1940년대 분위기가 아닌

현대식 분위기이고 또한 실제로 이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단 한 컷도 찍지 않았다고 하니

릭스 카페는 한마디로 가짜로 영화의 분위기만을 살린 카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

다 대신 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니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 백화점 길거리에 늘

어 선 고급 카페 및 상점 등과 함께 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내가 유럽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마저 들며 이 나라가 서구를 향한 발돋움이 한창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니 상품 숫자는 다소 떨어

지나 우리나라 슈퍼마켓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주변을

포함한 큰 도로 안쪽의 분위기는 노숙자를 포함해 행인들의 행색이 전혀 달라졌다 문득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현상이 모로코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농업에 치명타를

가해 이농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과 아까 보았던 하산 2세 사원 주변과 시

내 외곽 지역의 주민들이 떠오르며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도 빈부차이가 매

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호텔로 돌아와 TV를 보면서 아까 시내 외곽을 둘러

볼 때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

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우리나라와 같이 모로코의 기존 의식구조

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면서 젊은이들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잘

해결해 가는가에 모로코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잠시 해 보면서 모

로코에서의 첫날을 마감하였다

12월 27일(화) 둘째 날 모로코를 새롭게 알게 되다

(라바트 ndash 페스 - 탕헤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저녁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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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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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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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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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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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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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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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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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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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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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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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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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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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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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6: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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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야채가 나오는데 반해 커피가 안 나오고 아침 식사에는 커피는 나오는데 야채가 안

나온다는 점으로 이것은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오전 7시에 모로코의 수도

lt라바트gt로 출발하였다 라바트

는 lsquo성채 요새rsquo란 뜻으로 정

식 명칭은 라바트 엘파티프

(Rabat el-Fatif)이다 대서양에

면한 카사블랑카 다음가는 대도

시로 카사블랑카의 북동쪽 대

서양 연안의 부레그레그 강 하구

좌측 연안에 있으며 북아프리카

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sim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왕국 천도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기원이라

고 한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카사블랑카 시내는 어둑어둑하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

였을 때 주변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으며 고속도로 주변으로 3~4층짜리 공동주택

단지들과 함께 멀리 해안가 쪽으로 공업단지 등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모로코 공업 생산

의 90가 카사블랑카와 주변에 집중되어 있고 수도 라바트로 통하는 도로연변의 동부와 북동

부가 공업지대를 이룬다는 사실과 역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수출입 무역의 34이 통과하고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middot도로망의 중심지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7시

반쯤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버스는 약 1시간 반이 지

난 오전 8시 반경에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도착하였다

라바트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카사블랑카와 달리 모로코의 수도답게 라바트는 도시 자체가

수목이 어울려 있으며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시가에 있는 왕궁middot정부청사middot외국공관middot

유럽인 거리middot라바트대학 등은 유럽풍과 아랍풍의 건조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라바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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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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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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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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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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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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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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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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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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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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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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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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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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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7: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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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도시의 가로수는 카사블랑카의 종

려나무와는 달리 lt벤자민gt이라는 고무나무와 오렌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신시가지에 있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왕궁으로 가이드

말로 사진발 좋은 장소라고 한다 왕궁입구 진입로에는 사각형으로 단장된 벤자민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는데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왕궁은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거주하고 있으며 총리 집무실과 국가 공식행사 모두 이곳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는 화려하겠지만 왕궁 외부는 지붕이 유약을 바른 청기와이고 벽은 베이지색을 띤

수수한 형태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요란하지 않은 점이 내게는 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왕궁 외부를 일반인에게 자유롭게 오픈하여 이른 아침 고요

하고 넓은 공원 같은 왕궁을 산책하듯 관광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며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 입구에 보초병이 3종류라는 사실로 빨간색의 근위병 초록색

베레모를 쓴 민병대 그리고 군인 제복의 친위대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

찰도 있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관광을 마치고 성내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참고로 라바트는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lt메디나(이슬람 시장 거리)gt와 lt밀라(유대인 거리)gt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흙벽 담으로 만들어진 카스바데우다이아 문과 3년간 건설되다 중단된 미완의

건축물인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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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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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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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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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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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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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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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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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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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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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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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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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8: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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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스바데우다이아 문을 통해서 하산 탑과 모하메드 5세 묘를 보러 갔다 lt하산 탑gt

은 모하드 왕조의 알만수르라는 건축가가 이곳에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장대한 모스크 건설

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큰 지진으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1변이 16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 44 m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카사블랑카에서 본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탑보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

는데도 불구하고 더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탑이었다 또한 탑 남쪽으로는 사원을 건설하려고

사용하였던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광장에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돌기둥 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모여져 있는 것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산 사원 옆에 모하메드 5세 묘 및 전몰 유공자 묘 건물이 쌍둥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lt모하메드 5세 묘gt 건물에는 4각뿔 형태의 파란색 벽돌 지붕이 있는데 반해 전몰 유공자 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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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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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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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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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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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4 -

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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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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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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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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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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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19: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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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1961년에 서거한 모하메드 5세 묘는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6년(1962-1967)간 정성들여

완성한 묘지로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왕실 묘로 내부 분위기는 인도의 lt타지마할 묘gt

와 유사하였는데 안에는 중앙에 모하메드 5세 묘 왼쪽에 하산 2세(모하메드 6세 현 왕의 부

친) 묘 오른쪽에 모하메드 6세의 작은 아버지 3부자가 잠들어 있다

다시 하산 탑과 하산 사원 터를 둘러보니 대서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언덕위에 세워

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부레그레그 강을 사이에 두고 라바트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lt살레gt가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살레는 모로코 대서양 연안에 있는 옛

해항이며 성곽도시로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은 오래된 도시로서 관광 명소이기도

하며 모로코 독립운동 때에는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17세기에는 해적의 근거지가 된 적도

있었으나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 보호령 정청을 둔 후에는 한 때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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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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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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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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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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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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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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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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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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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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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0: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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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그 후 모로코 왕국으로서 독립했을 때에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자치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라바트를 출발하여 동쪽에 위치한 모로코의 역사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페

스(Fez)로 떠났다 라바트를 벗어나서 살레 외곽 도로로 들어서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코르크 마개를 만든다는 코르크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고로 코르크나무는 Quercus suber로 참나무 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며 보통 지중해성 기후

에 생존하며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껍질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증기로 쪄서 말려

압착시킨 것이 코르크 마개라고 한다 포르투갈이 최대 코르크나무 산지이나 최근 모로코에

서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의 아래쪽 부분의 껍질

을 채취하였기에 마치 아랫도리가

벗겨진 모습과 같아 웃음이 나왔

다 또한 약 2시간 반 동안 달리는

버스에서 보니 라바트 도시 주변은

숲이 무성한 산림지역 또는 낮은

구릉지의 밀밭 또는 설탕 원료인

사탕무가 심어진 평야 지대였는데

동쪽 페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구

릉이 높아지면서 사막화된 토지에

올리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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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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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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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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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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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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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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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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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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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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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저 멀리 산맥과 함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세기의 고대 도시 메디나로 유명

한 lt페스(Fez)gt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고로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 지역을 lt메디나gt라

부르며 세계 최대의 미로로 알려져lsquo미로의 도시(골목 도시)rsquo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구시가

지 메디나는 801년 모하메드의 4대손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왕국의 수도로 삼았

을 때 산 아래 분지형태 도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세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디나는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방어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침입한 적군에 맞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무려 9600여 개에 이르는 협소한 골목은 좁았다 넓어지고 뻗었다 구부러지

며 어느 하나 닮은 길 없이 완벽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좁고 곡선이 많아서 수레는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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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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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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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5 -

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6 -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7 -

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8 -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9 -

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2: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2 -

수 없고 골목의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 정도뿐이라고 한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지중해와

알제리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857년 이슬람신학 대학과 아랍 문

예의 중심 lt알 카라원 대학gt이 설립되어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하는 도시로 불렸

으며 이 당시 15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메디나는 물자 운송보다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로가 아

닌 좁고 꼬불꼬불하며 비탈길을 고집했기 때문에 도시는 악취와 질병이 만연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결국 13세기 모로코 4대왕조인 메레니드 왕조때 이 고대 도시 메디나 주변에 신시가

지를 건설하면서 페스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즉 신시가지에는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비롯해 너른 광장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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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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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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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6 -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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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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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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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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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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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도로를 갖추었다 또한 1912부터는 프랑스 이주민 정착을 위한 또 다른 신시가지가 건설

되었다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페스 신도시를 거쳐

페스 왕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페스 신도시에서 빨간색의 페스 택시노조가 길 양쪽 1차선을

차막이로 막으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소 놀랍기도 하면서 이 나라 국민 수준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 왕궁의 시민을 위해 새롭게 단장(리모델링())시킨 lt심판의 문gt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위해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퇴각시 함께 도망 와서 정착하였다는 왕궁 옆에

만들어진 유태인 시장거리를 통과해서 구시가지 메디나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고 부티()나는 곳으로 고급스런 느낌마저 들었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4 -

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5 -

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6 -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7 -

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8 -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9 -

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4: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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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점심으로 이곳의 전통 음식인 lt쿠스쿠스gt를 먹었다 참고로 쿠스쿠스는 사막의 베르베르

족이 먹던 음식으로 밀가루를 비벼 만든 알갱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채소를 얹은

뒤 각종 소스로 비벼 만든 것으로 모로코 여행 중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

친 후 메디나의 미로를 안내해 줄 모로코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로코 남자의 전통의상으

로 마법사 복장과 유사한 lt질레바gt라는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현지인을 포함해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라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고 현지 안내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주기 때문에 메디나는 사

막의 모로코인 들에게는 그야말로lsquo삶의 터전rsquo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

갈수록 길은 더 좁아지고 꼬불꼬불해졌는데 그 좁은 길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학

교에서 돌아오는 현지인 학생 시장 다녀오는 현지인 등이 가끔씩 지나치고 가끔씩 생필품을

파는 구멍가게나 작업장 식당 등이 나타났으며 집 입구에는 수도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 이 위쪽 지역이 메디나 사람들의 실제 거주구역인 것 같았다

한참 걷다 골목을 도는 순간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전통시장과 같이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있었으며 호

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한편으론 일행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대문 형상이 술 저장하는 통 같은 모양을 하고 있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lt카라윈 모스크gt(Mosquee Qaraouiyne)로 페스에서 가

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전파하여 아라비아 숫자라

고 알려지게 한 원조국이 바로 모로코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시 시장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파리네(Seffarine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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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6 -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7 -

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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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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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5: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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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었다 어릴 적 시골 대장간에서

괭이 칼 낫 등을 만들던 모습이 떠오르며 반가운

생각이 들어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를 찾아갔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

고 염색하는 작업장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죽가

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었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

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은 이 풍경

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

경([2007 인도문화답사기] 참조)과 흡사하였는데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 같았다

참고로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며 이곳의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

수의 유명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하는데 이곳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은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빈민촌 같은 이곳에서도 집집마다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인데 전파를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TV와 위성방송 프로그램들이 이곳 빈민층 젊은이들의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6 -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7 -

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8 -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9 -

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6: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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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던지 밀입국

등을 통한 유럽 탈출 러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와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

니 메디나의 저지대가 나왔다

오후 3시 반경 페스를 출발해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 탕헤르로 향하였다 버스가 페스

를 벗어나 아까 왔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라바트 못미처에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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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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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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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7: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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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로부

터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모로코 국기에 관한 사실로 현재 국기는 빨간 바탕에 중앙에 별이나 원래는 711년

스페인 침공 시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술래이만(솔로몬)의 별인 오각별

이었는데 외국에서 논란이 일어 지금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고 초록색 오각별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하면서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은 현재에도 페스와 같이 왕궁 근처에 밀집

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믿기 어려운 것 같은데 유대인들 거주 구역이 왕궁 근처

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둘째는 모로코인 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는데 근거한다고

하면서 마호메트가 좋아한 세 가지는 향수 고양이 그리고 여자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주

장인 것 같음

셋째 세계 땅 부자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 2위는 교황(바티칸 및 전 세계 성당 및 땅)

이고 3위는 모로코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 같다 넷째 7세기~11세

기는 아랍계통이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으

나 12세기~15세기에는 베르베르 계통의 모로코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로 예로부터 모로코가 한낱 북아프리카에 있는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약 5시간 걸려 오후 8시 반 정도에 야경으로 빛나는 lt탕헤르gt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탕

헤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로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스페인과 페리보트로 연락되고 자유무역구도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 28 -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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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8: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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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 표적이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7세기

말부터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middot스페인middot영국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

다가 1648년부터 모로코령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 표적이 되어 1902년 스페인-프랑스 조약에서 국제도시로서

의 지위를 선언 받았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스페인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

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되었

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탕헤르 바닷가에 위치한 타리크(Tarik)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한 후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베란다에서 바닷가 풍경을 보니 마치 부산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서 느끼는 해운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베란다에서 술을 한 잔 마시며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 여행한 모로코와 내일부터 여행할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여행전 조사하였던 스페인 역사와 함께 묶어 모로코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모로코 베르베르인 출신인 타리크가 옴미아드 왕조의 장군으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을 시작하여 반도 23 이상의 대부분 영토에 이슬람 세력을 뻗히고 756년 후기 옴미아드 왕

조가 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만들어졌을 때 모로코는 정통 아랍계 무슬림에 의해 지

배되었다 따라서 787년 아랍계통의 무슬림 세력에 의한 모로코 최초의 통일왕조인 이드리스

왕조가 페스를 수도로 세워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31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아랍계 무슬림에 의한 후기 옴미아드 왕조의 멸망과 함

께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도 몰락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62년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

르인에 의한 모라비드 왕조가 세워지고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며 대제국을 세웠

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한 아랍계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지배자로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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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

Page 29: 2016년 이베리아 반도 및 모로코 여행기 - Kookmin

국민대학교 기계공학부 명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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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이슬람의 화려한 문화와 향락에 빠져 급속히 타락해 1147년에 멸망하고 모하드 왕조

가 라바트를 수도로 재건을 꾀하였으나 모하드 왕조도 1212년 코르도바 동쪽에 있는 도시

Linares 부근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점차 잃

어가며 쇠퇴하는 혼란 중에 1246년 페스를 수도로 한 메레니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메레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지역에 대해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강해진 가톨릭 세

력의 반격에 옛 영광을 잃고 점차 쇠퇴하던 중 쿠테타로 1465년 와타시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1492년에는 반도에 남아 있는 이

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마저 잃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로코의 영광은 약 200년간의 모라비드 왕조 및 모하드 왕조 시대였으며 그 후 쇠퇴

하다 대항해 시대인 15세기 이후에는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만약 모하드 왕조가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이

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현대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현재 모로코인들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떤지 궁금

해졌다